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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닭 울음소리가 깊은 어둠을 가르고 문간 앞까지 들어왔다. 아스테리다는 피곤한 낯으로 눈을 떴다. 아무리 인간들처럼 생활해도 피가 돌지 않는 차가운 육신은 지금이 사냥의 적기라고 판단한 듯 쉽게 잠에서 깨어난다. 기이한 빛을 뿌리는 적색 눈동자. 미약하게 흔들리는 양초의 빛. 나방 몇 마리가 불꽃에 이끌려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개의 발소리가 울렸다. 나무 문은 잠겨 있었으나 습격자들을 상대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뱀파이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체 수백구를 끌어내 말뚝을 박고 성수를 뿌리는 사냥꾼들이 쉽사리 물러날 가능성도 없으리라. 이게 다 그 개새끼 때문이야. 아스테리다는 잠긴 문 뒤편에서 작게 욕설을 뱉었다. 그가 아직 인간이었다면 맹렬히 박동하는 심장 소리, 식은땀, 야음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다홍색 눈동자 같은 것들을 지니고 있었겠지만, 차디찬 시체 같은 몸에는 일말의 인간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촛농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닭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리고, 가축들이 호응하듯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부드러운 살갗을 찢는 폭력적인 소음. 쇠뇌에 화살을 끼우듯 부스럭거리는 움직임. 나무판자가 인간의 무게에 짓눌려 짧게 비명질렀다. 문틈 너머로 들리는 모든 소음이 아스테리다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촛대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스테리다는 반사적으로 침대 아래쪽에 숨겨 둔 해머를 꺼내 들었다. 평소라면 ‘작업장’에 두었을 물건이나 며칠 전부터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듯 물건의 위치를 바꾸었다. 이윽고 문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스테리다는 문이 부서지는 것을 신호로 침입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심산인지 양초를 껐다. 나무판자가 굉음을 내며 요동치다 잠잠해졌다. 아스테리다는 여전히 해머를 쥔 채 경계하듯 문가에 서 있었다. 허리케인 전의 고요처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시퍼런 도끼날이 판자를 뚫고 형형한 날을 드러냈다. 괴물 따위가 인간 사이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지. 인간 흉내를 내면서 얼마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어서 안달 났을까. 나무 판자의 구멍 사이로 새까만 눈동자 여러 개가 아스테리다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서 됐냐? 난 그냥, 하던 대로 소나 키우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었다고! 날 좀 내버려 둬! 나무 판자가 으깨지면서 침입자가 불나방처럼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해머가 도끼날과 세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은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해머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을 자르고 말뚝을 박을까? 아니지. 인간들 사이에도 이런 끔찍한 괴물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 밖으로 끌어내.
 
 
* * *
 
 
아주라는 이른 새벽 은신처를 떠나 마을로 향했다. 으레 뱀파이어들은 땅거미가 깔릴 때부터 새벽까지 가장 활발하게 인간을 사냥하므로, 뱀파이어를 발견하고, 사냥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시간대에 움직여야 했다. 여럿이면 몰라도, 혼자 다니는 사냥꾼들은 여명이 밝기 전 괴물이 가장 허약해졌을 때 붙잡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성절 전야 같은, 소위 ‘불길한 날’을 피해 며칠째 삿된 것들을 쫓느라 그랬던 것이 큰 이유지만, 그 며칠 사이에 뱀파이어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리라. 물론 뱀파이어에겐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덤이다.
 
마을은 언제나 그렇듯 항상 고요했다. 우리 뱀파이어 사냥꾼은 경비대나 기사와는 다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악한 무리와 싸워 마을을 지키는 것이 임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지만 신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보고 계신다. 그러니 행동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존중하며, 적에게 자비를 보이지 말라…. 누가 했던 이야기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마을 어딘가에 숨어 사람을 해칠 기회만 잡는 괴물을 사냥하는 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지만 일찍 잠자리에서 깬 농부나 대장장이 몇이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아주라는 민가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어둠 속을 헤치고 지나갔다. 혹여 원한을 품은 뱀파이어가 쫓을까 이따금 뒤를 돌아보고, 주위를 훑고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코트 깃을 올렸다. 마을 한 구석, 이상하게 해가 들지 않는 언덕 아래에는 푸줏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장간이나 식료품점이 문을 열고 나서야 느지막이 문을 연다고 하니 당연히 지금 시간에 문을 열었을 리 만무했다.
아주라는 푸줏간 근처에서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닭 울음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걸음을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모가지가 비틀린 닭이었다. 바닥에는 나이프와 피가 흥건했고, 외양간이나 마구간 따위도 그다지 성한 꼴은 아니었다. 단순한 강도라면 가축까지 손을 뻗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집주인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가져가면 그만이니까. 아주라는 거의 뛰다시피 안쪽 침실 문을 걷어찼다. 아무도 없었다. 나무 벽에 빗맞은 은화살 몇 개가 꽂혀 있었다. 동료가 먼저 손을 썼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아주라의 얼굴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불안, 혹은 분노에 가까운 무언가가 섞인 낯으로 그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아스테리다의 행방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푸줏간 바깥, 기둥에 양손이 말뚝에 박힌 채 거의 죽어가는 뱀파이어가 도망칠 리 없다. 안면이며 셔츠며 온통 피범벅에, 붉은 눈동자는 탁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확실히 죽는다. 그러지 않아도 사냥꾼의 의무를 다한다면 먼지처럼 그것들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무저갱의 지옥으로, 신의 은총이 닿지 않는 저 밑바닥으로….
아주라는 죽어가는 뱀파이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아스테리다는 인상을 쓴 채 그를 쏘아보았다. 죽일 테면 죽여 봐라.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탁한 녹색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아스테리다.”
“…….”
“당신에게 고하지 않은 게 있었군요.”
 
아주라는 아스테리다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저는 당신이 사람을 해치는 것을 직접 목격한 후 응당히 그에 따른 처벌을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아스테리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 이 빌어먹을 사냥꾼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지켜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당신은 제 사냥감입니다. 다른 누가 당신을 먼저 처리하게 두지 않습니다. 그가 두 손에 박힌 말뚝을 억지로 뽑아냈다. 잘 포장된 척해도 결국 사냥꾼의 의무를 저버린 것과 다름없다. 가냘픈 신체는 고정하는 물건이 사라지자 그대로 풀썩 엎어졌다. 아주라는 자연스럽게 아스테리다를 한 팔로 받아 들었다. 아스테리다는 짧게 저항하듯 손을 들어 올렸으나 결국 포기한 듯 짜증스러운 얼굴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입 모양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알았으니까 좀 닥쳐. 미친 새끼야…. 사냥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아스테리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들리지 않는군요.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지요. 아스테리다는 힘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뒤이어 허우적거리며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아주라의 어깨를 후려쳤다. 아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아주라는 다시 아스테리다의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몸싸움이라도 있었는지 침실 문이 부서져 있었다. 바닥은 피와 화살, 촛대와 녹은 양초 따위가 마구 뒤섞여서 엉망이었다. 아주라는 걸레짝이 된 침대 시트 위에 아스테리다를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바깥 어스름이 완전히 차단돼 집 안은 온통 흐릿한 푸른 빛에 잠겨 있었다. 아스테리다의 탁한 적색 눈만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왜, 아주 안 보이는 데서 처리할 참인가 봐? 아스테리다는 비아냥거리듯 사냥꾼을 쏘아보았다. 제아무리 말과 행동이 다른 짓을 벌이는 인간이라 해도 뱀파이어 사냥꾼이다. 아주라의 손에는 나이프가 들려 있으므로 오해를 부추기기는 쉽다. 아주라는 대답 대신 아스테리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침대 위로 올라타더니 느닷없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시고 입이나 벌려 보십시오.”
“이게 미쳤나 진짜….”
 
아스테리다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아주라를 밀어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거꾸로 쥔 나이프가 창백한 피부를 가르면 붉은 액체가 느리게 흘러내렸다. 뱀파이어의 시야는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 이 모든 과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뺨 위로 뜨뜻한 액체가 몇 방울 튀었다.
 
“진짜 미쳤어? 안 먹는다고 했잖아!”
“역시 어둠의 자식답게 야만스럽게 이로 흡혈하는 쪽이 마음에 드신다는 뜻이군요.”
“내 말 듣긴 한 거야? 그리고 누가 어둠의 자식이야?”
 
아스테리다는 다시금 아주라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그를 밀쳐내려 했으나 습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육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탁한 녹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섬뜩한 빛을 품고 있었다. 아주라는 피가 흐르는 팔뚝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가, 아스테리다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스테리다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려 했으나, 입 안으로 들어오는 인간의 체액에 순간적으로 상대의 혀를 확 깨물었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짧게나마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아스테리다는 그대로 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액체를 조금씩 삼켰다. 간신히 사지를 움직일 수 있을 즈음이 돼서야 아스테리다는 입을 떼고 아주라를 세게 밀쳤다. 뺨을 세차게 후려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새끼, 개새끼, 진짜…. 하다하다 뱀파이어한테 자기 피를 먹이는 사냥꾼은 처음 본다.”
“저도 피를 내주는 것은 당신이 최초이니 당신이 저를 홀린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뭔 개소리야? 무슨 개소리냐고?”
 
비난은 달게 들을 터이니 우선 이동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주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 안은 아직 푸른 빛에 잠겨 있으나 곧 해가 뜰 것이고, 아주라 혼자서 다친 아스테리다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아스테리다는 무어라 더 비난하려는 것처럼 한참이고 아주라를 노려보다가, 결국 포기한 낮으로 입을 뗐다. 어디로 갈 건데. 우선은 제 은신처로 향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곳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른 곳에 터전을 잡을지, 시간을 두고 지켜 보다가 돌아올지 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살다살다 뱀파이어 사냥꾼의 거처에서 머물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아스테리다는 여전히 불쾌한 낮으로 아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마신 인간의 혈액 탓인지 자괴감과 충동이 뒤섞인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아주라는 묵묵히 침대에서 내려와 아스테리다에게 걸치고 있던 코트와 모자를 던져 주었다.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카락과 품이 조금 넓어 보이는 셔츠가 드러났다. 허리춤에 나이프와 말뚝, 짧은 손도끼를 장착해 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띌 것이 없는 차림새였다.
 
“해가 들어도 잠깐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아스테리다는 아주라 쪽으로 다시 모자를 홱 집어 던졌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여전히 신체가 덜 수복된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옷장에서 검은색 로브를 꺼내 대강 걸쳤다. 아주라는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제 코트를 받아서 들었다. 쳐다보지 말고 빨리 나오기나 해. 오늘따라 굉장히 난폭하시군요. 이게 누구 때문이겠냐? 아스테리다가 역정을 내듯 홱 돌아보았다. 이전보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아주라를 향했다. 아주라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부서진 문을 슬쩍 넘어갔다. 그야 제 사냥감을 노리는 자들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누가 네 ‘사냥감’이냐고?! 문밖을 완전히 나설 때까지 말싸움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 새벽을 달리는 그림자 두 개가 보였다. 삼하인이 끝나면 새로운 한 해가, 계절이 돌아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제자리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죽지 못한 자도, 죽이지 못하는 자도 끊임없이 도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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