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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맞지 않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두터운 먹구름은 빛을 시기하여 창백한 달빛 한 점 비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고 시야는 빗방울에 가리기까지 해 한 치 앞을 살피기 어려웠다. 누구든 바깥을 나다니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날이었다. 이런 때에는 벌레와 짐승, 인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저마다의 안락하고 따스한 곳으로 숨어든다. 자연의 폭정을 감내하며 바깥을 배회하는 것들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는데, 그런 것들이 마냥 다정하지는 않을 것임은 누구나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정체 모를 불청객을 꺼리는지 보이는 집마다, 창마다 두터운 커튼이 내려와 안을 가렸다. 바깥에서 보이는 풍경이란 삭막하고 어둡기만 해 꼭 마을 전체가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중력에 떠밀려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제외하고 나선 유일한 움직임이라고는 길을 가로지르는 검은 우산의 형체뿐이었다. 넓은 우산은 동그랗게 퍼져 흔들림도 없이 묵묵히 이동했다. 그 아래서 샛노란 색의 땋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보였다 가려지기를 반복했다. 집안에 갇혀 있기 답답한 어린아이들이 부모님 몰래 커튼을 걷어내고 바깥을 지켜보기라도 했다면 분명 겁에 질렸을 모양새였다. 검은 옷, 검은 우산, 검은 가방은 어둠에 쉽게 잠겨 꼭 그림자가 일렁이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죽음 같기도 하고 비밀 같기도 했다. 내딛는 구둣발은 찰박이는 웅덩이를 지나면서도 단정하고 단호한 기색을 가졌다. 목적지를 아는 자만이 가진 확신이었다. 그를 엿본 이들은 모두 창문의 잠금쇠를 확인하고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걸음이 한 번을 머뭇거리지 않고 이어졌다. 그는 집과 집을 지나치고, 명패를 한 번 확인하는 일도 없이 길을 빠져나갔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오르막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길을 따라가면 성과 같은 자태의 저택 하나만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존재감을 뽐냈다. 하늘에도 보이지 않는 달이 땅으로 쏟아져 내린 형상이었다. 창백하고 푸른 빛이 주는 음산한 심상이 있잖은가. 검은 장코트 자락에 몸을 숨긴 남자가 드디어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그는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창가에서는 사람 하나가 흐릿하게 비쳐 보였고, 바로 그 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흐려지는 자리에 숨어들 듯 묘지 여섯 개가 줄지어 있었다. 창가에 선 사람 역시 그곳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밝은 곳에서 어둠 속이 보이기나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묘를 집 근처에 두는 곳은 많다지만 침실에서 바로 보일법한 자리에 무덤을 세우는 사람은 잘 없다. 어지간히 소중해 멀리 떨어트려 놓고 싶지 않았거나, 다른 이유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남자가 현관을 향해 걷는 동안 세찬 바람은 나무 사이를 넘나들며 우우우 흐느낌 같은 소리를 냈다. 빗방울은 그치지 않는 눈물이었으며 흐느낌은 추모였나.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답잖은 감상을 쉽게 접어 옆으로 밀어두기로 했다. 우산을 접어 현관의 차양 아래에 서면 꽤 깊은 현관에도 비가 언뜻 들이치고는 했다. 사자를 닮은 조각에 매달린 문고리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고, 바람에도 미동이 없는 걸 보아하니 이 쇳조각이 꽤나 무거운 모양이었다. 남자의 무표정한 낯에 짧게 반가움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천둥이 번쩍였다 사라지는 찰나와 비슷했다. 그는 얕게 드러난 감정을 익숙하게 갈무리한 채, 문고리를 쥐고 문을 쿵, 쿵, 두드렸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남자는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땅에 짚어 선 채로 집의 주인이 나와 그를 맞이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저택의 주인이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남자는 다시 문을 두드려 재촉하지도 않았고, 안을 기웃거리거나 돌아나가지도 않았다. 펄럭이는 옷자락이나 머리칼이 아니었다면 사자와 같은 청동 조각상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형상이었으니, 주변의 사람을 물린 악천후에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문이 열리고 실내의 빛을 후광처럼 감싼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빛이 주변으로 떠도는 듯 화려한 생김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늘어져 굽슬거렸다. 남자는 그것을 잠깐 눈에 담았다가도 그러지 않은 양 여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실례합니다. 마을을 지나려 하는데, 비바람이 너무 심해 묵어갈 곳을 찾고 있습니다. 하루만 방을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답 대신 여자는 불청객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을 피하지 않았으니 정적을 감싼 대치가 몇 초간 이어졌다. 그간 얼음장 같은 낯에서 무엇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이름도 신분도 묻지 않은 채 여자가 몸을 뒤로 물렸다. 허락의 표시였다.

“들어와요, 마침 저택을 수리할 일이 생겼는데 잘됐네.”

“사용인은 없습니까?”

“응, 혼자예요.”

홀에 들어선 남자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긴 코트를 벗어 팔에 걸치며 주변을 훑었다. 저택에 가까워지는 내내 창가에서 일렁이는 인영은 단 하나뿐이었으니 짐작한 일이었으나, 저택 내부로 들어오니 사정은 더 훤히 보였다. 혼자라던 여자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저택 곳곳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낡고 허름했다. 사람이 생활하기만 해도 흔적이 남는 자리들에 먼지가 두텁게 쌓인 것을 보아 이 여자는 본인의 집을 활발히 돌아다니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혼자 살만한 규모가 아닌데, 실례지만 바깥 분께서는.”

“다 죽었지.”

“다?”

“죄다.”

가벼운 어조는 높낮이가 비슷해 속삭이는 것처럼도 들렸다. 남자가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여자가 뒤돌았다. 앞선 대담에 어떠한 부연도 덧붙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거나.

주인이 앞서고 손님은 그 뒤를 쫓았다. 원체 무뚝뚝한 방문자는 먼저 말을 꺼내놓는 일이 없어 길게 늘어뜨린 숄이 바닥에 끌리거나 밟아 휘청인 적은 없는지 신경 쓰며 묻는 정도가 다였다. 말주변이 없는 만큼 다른 방면에서 재능을 구했는지 성실하고 재주가 좋아 여주인이 가리키는 곳마다 오래지 않아 새것처럼 변모한다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비가 새는 천장,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 대며 비명 지르는 나무 창틀, 헛도는 문손잡이 따위를 고치고 있으면 여자는 어딘가로 떠나지도 않고 집중해서 집안이 변모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기에는 지루할 법한 일들인데. 하나의 일을 완수하면 칭찬처럼 내보이는 느슨한 미소만이 반응의 전부였다. 눈에 띄게 기뻐하지도 않았고 가끔은 아쉬워 보이기까지 했다. 묵어가기 위한 모든 의무를 완수한 남자가 공구를 정리하며 그에 대해 묻자, 여자는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 올리기만 했다. 조형적인 아름다움 위로는 연원 모를 그림자가 드리워도 조미료처럼 작용할 뿐이다. 이 저택에 몸을 들인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남자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가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생했으니 식사를 대접하죠.”

공구함을 원래 있던 자리에 밀어 넣자마자 여자가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걸어가는 여자의 뒤를 남자가 세 걸음 뒤에서 쫓았다. 울리는 발소리는 꼭 한 쌍 뿐인 것 같다.

“예. 그런데 아직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만.”

“음, 질문이 뭐였더라?”

“저택을 수리하는 게 사실은 탐탁치 않은 건지 여쭸습니다.”

“나름대로 추억이 있었으니까요. 내버려 두면 불편하니 고치긴 해도.”

“추억입니까.”

“그래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문제였거든. 그걸 고쳐 준다더니 죽어버렸어.”

농담이라도 한 듯 옅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불청객은 잘 만들어진 농담에도 웃지 않는 이였던 탓에 동조하지도 따라 웃지도 않았다.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것 같은 남자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요.”

한숨 같은 목소리는 문을 여는 소리에 밀려 반쯤 흩어졌다. 키 큰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안을 드러냈다. 넓은 식당에는 아름다운 음악이며 환대며, 무엇도 없었으나 고작 두 사람 먹이기에는 많은 양의 진수성찬이 테이블 가득 늘어선 채였다. 신선한 샐러드와 빵. 큼직한 건더기가 가득 든 스튜, 향신료와 버터 향기가 뒤섞여 풍기는 으깬 감자, 칼집을 내 갈라진 부분에서는 다진 소고기가 소스로 반질거리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미트파이, 한 마리를 통으로 구운 오리고기의 아래에는 육즙이 젤라틴처럼 굳지도 않아 따뜻하게 찰랑이는 데다, 주요리는 하나로 그치지 않고 향신료를 잔뜩 발라 겉면을 바삭하게 구운 소고기 스테이크가 함께 했다. 음식마다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걸 보니 금방 준비한 모양이었다. 비를 잔뜩 맞아 추운 날 따뜻한 음식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지는 것은 당연한 일.

여자가 기다란 식탁의 상석에 앉아 고개를 까딱였다. 남자는 자연히 그의 맞은편, 가장 끄트머리의 말석에 자리했다. 그들의 사이로 서로 마주 보는 의자 세 쌍이 놓여 있었으니 거리가 멀다면 멀고, 정체 모를 불청객에게 주어지기에는 가까운 자리였다.

시계를 확인하지는 않았다지만 남자의 시간 감각은 꽤나 좋은 축에 속했다. 가늠하기로 적어도 이 집을 방문한 지 두 시간은 지났고 그동안 여자는 내내 집을 수리하는 그의 옆을 지켰다. 잠깐 자리를 뜨더라도 식사를 준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이 집 주인 여자에게는 소문이 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에 처하고 나니 그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덩굴에 매달린 포도처럼 무겁고 갈래마다 뻗는 것들이다. 대다수의 소문은 당사자에게 좋게 흐르는 일이 없다지만 이 여자에게는 더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여인, 언덕 위의 마녀, 저주받은 성의 주인… 메두사며 사이렌과 같은 신화 속 괴물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붙는 말들. 마법과 저주를 요사하게 부리는 게 분명하다는 이야기. 저택 그림자에 묘지가 빼곡하게 자리 잡은 이유가 마법이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공포와 의심이 있다.

“이 댁에 함께 살던 분들에 대해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런 게 궁금한가? 신기한 취향을 가지고 계시네.”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쭉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왜죠?”

“이전에 손댄 흔적이 몇 군데 더 있더군요. 쉽게 닳는 자리니 당연합니다만. 꼼꼼하게 손을 보았던 것 같아서…… 그런 정성을 들일만한 사람이라면 이곳에 애착도 컸겠지요.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이 집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뭐… 그런가.”

여자는 으쓱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가, 숨길 거리도 아니라는 듯 입을 뗐다. “남편은 총 여섯이 있었어요. 좀 많지.” 비바람 부는 날 겁이 나 침대 속으로 숨어든 어린아이를 어르듯 조곤한 어조로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그가 이렇듯 누긋한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번째 남편이 이 성의 주인이었지. 여기 남은 초상화들은 다 그 사람의 조상이라던가……. 죄다 까만 머리에 화난 얼굴이잖아요. 피가 진해서 다들 닮았어… 남편도 꼭 그렇게 생겼었고. 난 결혼하면서 이 성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혼자 남았네. 그래도 그이는 그렇게 사랑하던 이 집에서 죽었어요. 아까 우리가 같이 내려왔던 계단 말인데, 거기서 발을 잘못 디뎌서 그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이를테면 나무에 스며든 핏자국 같은 것. 남자는 난간에 튄 핏자국의 사유를 이해하고 만다.

“두 번째 남편은 나보다 키가 좀 크고 눈이 파랬어요.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하늘을 보는 것 같았지. 봄에 요 앞 마을로 나가던 중에 죽었어요. 왜, 여기 언덕이 높진 않아도 건물이 들어서긴 좀 어렵잖아. 그래서 마을이랑은 거리도 좀 있고. 마차라는 게 그렇게 튼튼하다던데…… 사고가 났지 뭐예요. 슬픈 일이야.”

폭풍우가 거세진다. 창문이 덜컹대고, 악천후를 뚫고 왔던 불청객도 이제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 여길 정도로. 마치 누군가 하늘의 노여움을 사기라도 한 양.

“세 번째는 곱슬머리였거든.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으면 손가락 사이에 엉키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이랑은 바다로 휴가를 떠났는데, 즐겁자고 간 곳에서 시체나 봤으니 난 영 운이 나쁜가 봐. 남편은 원래 수영을 꽤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날따라 해초가 발목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나보다 운이 나쁜 건 내 남편일지도 모르고.”

저택 바깥의 소란에도 여자는 아랑곳 않고 나이프를 움직여 고기를 썰었다. 고립된 장소라지만 이 여자는 원래도 집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는 듯했으니, 새삼스럽게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 건지도 모른다. 차라리 위화감은 그가 나이프를 쥔 방식에서 왔다. 서툴게 쥔 식기가 그릇을 스쳤다. 음식을 먹는 행위에 서툰 듯했다. 빼짝 마른 가시 같은 몸이니 무엇이라고 많이 먹었겠느냐마는.

“네 번째인가. 나랑 키가 비슷해서 곧잘 눈이 마주쳤어요. 높은 굽이 있는 신발은 신지 못하게 해서 좀 답답했죠. 어느 날 사냥을 갔는데 독사에게 물렸다고 하더군요. 직접 보진 못했어요. 난 그날 아팠고, 혼자 있기 싫다고 했는데 나가버린 건 그이거든. 그러게 내 말을 듣지……”

입는 것, 먹는 것, 지내는 것은 그 사람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들 하는데.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도 여자의 옷에는 보석이 붙어 화려하게 반짝였고, 음식은 거의 먹지 않으며, 집은 말할 것도 없이 외롭고 텅 비어있다. 사람이 아니라 잘 꾸며진 인형 같아 보이는 여자다. 속에 무엇을 담아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열어 보고자 하면 깨트려야만 하는 도자기 인형.

“다섯 번째, 뭐. 할 말도 없네요. 심장마비였어요. 원래 좀 약한 사람이었거든. 나만큼은 아니어도 말랐고. 그래도 남자들은 뼈대가 있어선지 나만큼 가늘어 보이진 않아서 좋아. 여섯 번째는……. 아, 오늘만큼은 아니었는데 그 날도 비가 왔나. 그런데 물이 새서. 지붕을 수리하겠다고 올라 갔다가 번개에 맞았지. 사람이 번개에 맞을 확률은 아주 적다던데, 알아요?”

번쩍, 하고 빛이 먼저 들었다. 직후 소리가 울리는 걸 보면 아주 가까운 곳에 떨어진 모양이다. 천둥번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높은 지대여서일까.

“압니다. 확률이 적다는 것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니까요. 지대가 높은데다 지붕 위로 올라갔으니 불운하다면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흐음, 그렇게 생각하나.”

“의심하기를 바라십니까.”

“그건 아닌데, 뭐…… 모두 죽고 혼자 남았으니까.”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눈치가 빠르지 않은 남자는 파이지처럼 쌓인 말의 겹겹을 죄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알아챘다. 오래도록 의심받은 사람의 피로감, 불신하는 상대를 찔러 보고 싶은 마음, 흥미와 권태가 동시에 떠돌다 사라지는.

“이 저택은 넓고… 고양이가 살긴 하는데 고양이는 늘 어디 구석에 숨어들곤 하잖아요. 못 보는 때가 훨씬 많지. 외로운 곳이야. 사람을 새로 채우고 싶은 마음도 있어.”

“일곱 번째를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니 꼭 또 죽을 것처럼 들리네. 내내 죽는 이야기만 했잖아.”

입에 대지는 않고 나이프로 썰어대기만 하는 스테이크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스테이크는 취향이십니까?”

“그냥 요리에 서툴러서 그래. 요리사가 그만둔 지 얼마 안 됐거든.”

“왜 그만둔다고 하던가요.”

“죽은 이들이 자꾸만 튀어나온다고 해. 귀신이라니 웃기지.”

“그런 것이 실존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나도 마찬가지야. 차라리 나오기를 바라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없는 거겠지.”

“…….”

“왜 그렇게 보실까. 남편들이 죽었으니 만날 수만 있다면 유령이든 뭐든 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렇습니까.”

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얼굴에서 어깨로, 팔을 타고 떨어져 피처럼 붉은색의 와인이 든 잔으로 향했다. 피에 익숙한 그는 이것이 단순히 색이 닮은 음료일 뿐임을 앎에도. 도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순간.

식탁과 샹들리에에 올라 일렁이던 수십 개의 촛불이 모두 꺼졌다. 바람이 불어오지도 않았는데. 의자가 덜컥이는 소리가 울린다.

“의자가…….”

“바람인가 보지. 가끔 이래.”

“바람으로 모든 의자가 바깥으로 밀리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분명 누군가 여기에.”

불청객은 여섯. 죽은 이도 여섯. 사위는 어두워 주변이 보이지 않고, 그러나 남자는 기척을 느낀다. 그는 신을 믿지 않기에 어딘가 기도를 올리지는 않아도 이 순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기를 바랐다. 단순히 말주변이 짧아 설명할 수 있는 어휘를 찾지 못한 것 뿐이기를.

“그러고 보니 아직도 당신 이름을 모르네. 알려주겠어?”

흐으, 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말소리가 드문드문 끊긴다.

“에드윈 로젠버그.”

식탁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라든지.

“그리고?”

그릇끼리 부딪히는 높고 거슬리는 음.

“사업차 들렀습니다.”

“거짓말 못한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 빙빙 돌리지 말지, 우리.”

“당신 역시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난 지금까지도 거짓말이라곤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걸.”

화내고, 흐느끼고, 속삭이고, 바닥을 긁다가, 그릇을 움직이는… 이 모든 소리가 정말로 들리지 않는 걸까. 목소리에 겁이나 반가움 따위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에게 좋은 일일까, 아쉬운 일일까.

“조사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이 집에 관한 것? 이 집에서 일어나는 연쇄적이고 비참한 죽음들에 대해.”

“예.”

“당신이 누군데.”

“에드윈 로젠버그.” 같은 대답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번은 사람을 설명하는 말이 덧붙는다. “왕의 기사. 그분께서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사한 일이 있다면 확인하여 조치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순간 남자는 왕을 대리하였기에 말은 단단하고 누구에게도 높이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남자가 가진 충성심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의 유령도, 그 어떤 원한도 빛바래게 할 수 없는 고결한 것.

“기사님인가…… 그래도 어쩌나. 정말 이 모든 일이 저주거나 마법이라면 당신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지 않겠어. 난 진심으로 당신에게 협력하고 싶어. 말했지만, 내 모든 말에 거짓은 없고 나는 내 남편들을 만나보고 싶거든.”

“어떤 일에든 원인과 결과는 있기 마련이니. 당신만 허락한다면 모든 것을 들쑤시고 부수어서라도 알아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보든지. 묘지에는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그리고 하나 더.”

“말해 봐.”

“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번쩍, 여자의 뒤로 빛이 쏟아졌다. 벼락이 한순간 식당을 밝힌다. 남자는 기민하게 테이블을 둘러앉은 여섯의 면면을 확인한다. 분명히, 여자가 앞서 설명한 망자의 특징이 그대로 있다. 그들은 남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모두가 오로지 상석만을 눈부신 듯 바라보고 있었다.

빛과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리는 것을 보면 번개는 코앞까지 다가온 모양이다. 다음은 사람에게로 꽂힐까? 지난 언젠가처럼?

“므네모시네. 므네모시네 루 맥퀼란.”

그렇다면 이 번개는 무언가를 태우기 위해 하늘이 내리는 벌인가.

“남들이 말하길, 마녀라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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