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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야 이바노프 블라디미르에게 도드라지는 이상증세는 없었다. 적어도 제로니모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았다. 실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몇 번째인지 모를 얼굴 모를 여자와 즐겁게 대화하거나,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안대 대신 책을 얼굴에 덮어놓은 채로 벤치에 길게 누워 잠들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 책, 이름은 잘 보지 못했지만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작가의 이름이 크게 쓰여진 촌스러운 책이었다. 적어도 어떤 교양  서적과도 거리가 먼, 오로지 흥미만을 위한 경박한 소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로니모가 여느 날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마리야를 향해서는 눈짓도 하지 않고 책장을 넘기고 있었는데, 마리야는 마치 밥이라도 먹었냐는 듯한 평온한 어조로 한마디를 툭 뱉었다. 

 “시온이 날 죽이려는 것 같아.” 

 제로니모는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마리야가 아니라 서재의 아무 칸에 대충 쑤셔넣어지는 책에 시선을 두었다. 책의 제목은 ‘샤이닝’이었다.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작가의 이름이 크게 쓰여져있는. 


 날이 좋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시트 세탁을 했다. 저택 뒷편의 빨랫줄에 하얀 시트들을 널면 그 시트들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풍겼다. 물에 젖어 조금은 무거운 시트들을, 하녀들은 불평불만도 않고 빨랫줄에 걸어댔다. 그것은 제로니모도 마찬가지였다. 제로니모는 문득 펄럭이는 하얀색 시트 너머로, 하얀색 머리카락이 너울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꼭 이 하얗고 꾸밈없는 천데기들 같은, 그러한 긴 머리카락이 너울거리는 광경. 

“얘, 안 널고 뭐 하니?” 
“아…”

 제로니모는 자신이 시트를 든 채로 멀거니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애가 왜 그리 넋을 놓니. 이전 주인 나으리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너 같은 애는… 그러한 말들이 오갔지만 제로니모의 신경은 곧장 빨랫줄, 시트의 하얀 파도 너머로 쏠렸다. 바람이 잠잠해져 드러난 그 길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제로니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시트를 넣어놓는 일 뿐이었다. 

 늙고 괴팍한 주인이 죽은 이래로 저택은 한결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와중에 희게 부숴지는 파도거품처럼 너울거리는 흰 머리카락을 보고선 마리야의 말을 곱씹는 자신은 이 저택에서 유리된 존재라고, 제로니모는 그리 생각했다. 시온이 날 죽이려는 것 같아, 시온이 날 죽이려는… 

 시온이 그럴리가 없어.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나 시간은 무정하게 흐르기에 이튿날이 되었고 제로니모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의 나날들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제로니모는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그저 얌전히, 그저 우두커니 복도 쪽의 문 방향에 서서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자기 찻잔을 달그락대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들어 찻물을 입에 머금는 그 모습은 누가보아도 숙녀의 그것이었다. 고요하고 온화한 옆모습. 초승달같은 콧날이 몹시도 우아하게 느껴졌다.

 “식사도 그렇지만...”

 옆모습을 살짝 기울이는 간결한 동작만으로, 시온은 제로니모를 바라보았다. 

 “차를 마실 때에도 혼자 마시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마시는게 더 즐겁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니?” 

 그것은 꼭 제로니모에게는, 네가 나와 같이 차를 마셔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듯 놀라며 제로니모는 입을 우물쭈물 달싹였다. 그러는 사이에 시온은 낮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매번 마리야에게 차를 권하고 있단다. 그런데도 어쩜 저는 고양이혀라 뜨거운 것은 못 먹는다며 피해가는거 있지? 봐줄 수 밖에 없는 귀여운 거짓말을 하니 나도 넘어가줄 수 밖에 없지만 말이야.” 

 그 말에 제로니모는 다시 차분해졌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시온이 다정하다고 한들, 하녀에게 찻잔을 권할 여자는 아니었다. 모든 것에는 분수에 맞는 대우가 있는 법이다. 시온과 같은 테이블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저택에서는 오로지 마리야뿐이다.  

 자신이 시온의 말을 오해했다는 민망함 탓에 고개를 숙이고 제 발치를 내려다보던 제로니모는 낭랑한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퍼뜩 들었다. 

 “마리야는 보기보다 자존심이 강해. 그래서 아주 멍청한 체는 못하는거지. 똑똑하지만 현명하지는 못한 태도야.” 

 시온은 다시 차를 한모금 마셨다. 여전히 우아하고 고요한 옆모습이었다. 

 *

 마리야 블라디미르는 여전했다. 여전히 제로니모를 조금 귀찮게 굴었으며, 예쁜 여자 하인들에게는 살갑게 말을 걸거나 이따금은 곤란하게도 만들었다. 자유롭게 저택과 바깥을 출입했으며 그 누구도 얽매어둘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누군가에게는 불손하다 여겨질 정도로 지나치게 권위적이지 않았다. 

 서재로 들어가는 입구, 마리야가 문간에 서서 비스듬히 팔을 기댄 채로 제로니모를 바라보았다. 들어갈 수도 없게 입구를 몸으로 딱 막고 있어 비켜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봐. 귀여운 아가씨, 오늘 시간 있어?”
“없어.”
“있으면 오늘 밤… 내 방에서, 어때?”
“없다니까.” 
“이것 참, 매정하기는.”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싱거울 정도로 쉽게 서재의 입구에서 비켜주었다. 

 별 일 없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저택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시온은 엄하지만 온화한 주인이었으며 마리야는 무엇이든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젊은 여주인은 총명했으며 아랫것들의 걱정과 달리 가세가 기울어지는 일도 없이 매일의 나날을 순항하듯 나아갔다.

 그러니 제로니모는 마리야가 오죽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마리야 블라디미르는 단 말 한마디로 그 평화로운 세계에서 제로니모를 유리시켜버렸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을 보내고 있으면서 말이다. 왜 하필 나에게 그런 말을 했지? 왜 그 이후로 아는 척을 안 하지? 모를 일이었다. 제로니모도 구태여 그 일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마리야에게 찬동할 수 없다면 시온에게 해가 될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시온이 정말로 마리야 블라디미르를 죽이려고 한다면 자신은…

 그러나 마리야 역시, 제로니모가 자신이 아니라 시온을 택할 것임을 언제든 알고 있었을 터이다. 분명히 그랬을텐데도… 

 ‘어째서 나에게 그런 말을.’ 

 제로니모는 한동안 마리야를 탓하는 말만 입안으로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날 밤, 제로니모는 꿈을 꾸었다. 어두운 저택 안, 어쩐지 서고로 향하고 있던 자신의 앞에 유령의 천자락처럼 너울거리는 긴 하얀 머리카락의 여인이 보인다. 손에는 식칼을 든 채로 계단 위에 서있는 그 모습. 그녀는 제로니모를 보았음에도 매정하게 뒤돌아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복도를 나아간다. 제로니모는 본능적으로 외친다. 

‘시온, 그러면 안돼. 그러지 말아.’
어째서지?
‘다름 아닌 마리야, 그 애야. 얌전히 죽을 리가 없어. 네가 다칠 거야.’

‘주인 나으리도 네가 죽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마리야까지 죽어버리면…’
그 말을 정말 믿는 거니?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시온에게 반말을 쓰고 있지? 그것은 꿈이기 때문에. 그러나 꿈 안의 제로니모는 자각하는 일 없이 그저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가 멀어지는 그 인영의 하얀 뒷모습을 잡기 위해 달린다. 온몸을 감싼 몽롱한 감각에 제로니모는 발이 꼬여 그대로 붉은 카펫에 고꾸라지고 만다. 

 하얀 인영이 저 멀리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제로니모는 속단했음을 깨달았다.

 마리야 역시도 시온과 똑같은, 희고 긴 머리카락을 가졌는데 왜 나는 그 이를 시온이라고 생각했는지. 

 꿈에서 깨어난 뒤, 아침 식사를 담당하는 하녀들이 먼저 일어나 바쁘게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옅은 눈길로 바라보며 제로니모는 한숨을 쉬었다. 눈두덩이 위로 손등을 올려놓고선 기나긴 한숨을… 

 또 별다를 일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집안의 주인 격인 두 자매가 식사를 할 만찬실을 청소하고 난로에 불을 피운다. 계단을 닦고 홀의 난로에도 불을 태운다. 이때 날리는 잿먼지들을 바지런히 치워야 한다. 집에 오고 나서 시온이 제로니모에게 가장 먼저 일러주었던 것도 이것이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오니 흙먼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결에 소홀히 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해. 제로니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옳은 말이었다. 한참이나 먼지들을 강박적으로 치우고 난 뒤에는 사용인 홀의 한구석에서 비쩍 마른 빵과 수프를 먹는다. 설거지는 그날그날의 담당의 몫이었다. 나머지 오전 내내 침실을 비롯한 저택의 각 방들을 청소한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매일같이 이런 업무들이 반복된다.

 제로니모는 특별히 예쁨을 받는 편이었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는 서재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을 다른 하녀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 탓에 제로니모가 눈에 띄게 서재 쪽으로 가려고 하면 구태여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얘, 놀면 뭐 하니? 오늘 아침에 식당에서 그러던데, 세제도 없고 베이킹 소다도 다 떨어져간다더라. 필요한 것을 적어줄 테니까 잡화점에 가서 사와. 매번 사던 곳, 어딘지 알지?”
“...”
“대답은?”
“네.”

 제로니모는 선배가 건네준 메모장을 보았다. 그다지 몇 개 되지도 않는, 당장 떨어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도 없을 물품들. 분명 잡화점에서는 정기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배송해 준다. 아마 다음 주 수요일이면 물품들이 도착할텐데도 굳이 나를 보낸다는 것은… 제로니모는 고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군말은 하지 않고 채비를 했다. 시온의 얼굴을 한번 떠올렸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고작 하녀가 잡화점에 물건 몇 가지 사러 간다고 자동차씩이나 태워줄 리도 없었다. 그래도 제로니모의 바지런한 걸음으로 30분 정도만 걸으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였다. 안그래도 쌀쌀한 날씨 가운데의 돌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와 발끝을 얼리는듯했다. 코끝도 빨개지고 몸은 으슬으슬하였으나 어쩐지 저택보다는 시내가 훨씬 생기차게 느껴졌다. 

 로터리를 지나 다소 낡은 간판의 커다란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면 나이를 지긋이 먹은 주인이 아는 체도 안 하며 뻔히 바라만 보았다. 제로니모는 그의 태도가 성의 없다고 생각했지만 별달리 따져 묻는 대신 선배가 적어준 쪽지를 카운터 쪽으로 내밀었다. 주인은 수염을 문지르던 손으로 그것을 가져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유심히 보더니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녀인가? 어디에서 왔지?” 
“블라디미르 가. 여기에서 광장으로 난 큰 길을 따라서 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있는 그 저택.”

 제로니모는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덤덤히 대답했다. 시온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다음 주면 정기배송으로 갈 물건들인데… 뭐, 이 정도는 상관 없겠지. 돈은 그쪽에 달아두도록 하겠어. 그나저나 처음보는 아가씨로군.” 

 그러나 과연 그의 다음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장은 저에 비하면 머리에 피도 덜 말랐을 여자애가 퉁퉁거리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돌려 말했으나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예전 주인 나으리는 아주 엄하셔서 말이야. 저택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각이 잡혀서 보기가 좋았는데… 퉁명스러운 계집애들은 발도 못들였다고.” 
“...”
“지금은 그 따님이 이어받았다지? 안됐어. 아들도 없이 꼴랑 딸 하나만 있다니. 마님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 예전에는 이런 잡다한 일 관리는 마님께서 다 관리하셨거든. 아가씨께선 아무래도 마님보다는 무른 편이지?”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제로니모가 아니었다. 제로니모는 갈색 재생지로 만든 종이봉투에 물건을 담는 주인장을 째려보았다. 

“블라디미르 가에는 따님이 두분 계셔. 알지도 못하면서 말 얹긴...”
“무슨 소리야? 딸 하나만 있는거, 오래 산 토박이들은 전부 다 알걸.”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는지, 잡화점 주인장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초대면의 소녀와 기 싸움을 하는 것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감각도 없는듯했다. 

“이름도 알지. 마리야 이바노프 블라디미르.” 
“마리야 아가씨는 차녀야.”
“아, 알지. 양녀를 들였다고. 사촌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어디 출신인지도 모를 양녀가 집안을 이어받겠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인장의 의기양양한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침묵이 감돌았다. 제로니모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말도 없이. 말실수를 했다, 그리 여겼는지 주인장은 몇번 기침을 하곤 물건을 팩, 제로니모의 품에 던지듯 넘겨주었다. 

“뭐, 큰마님께는 구태여 이야기하지 말라고.” 
“시온님께서는 아직 결혼도 안했어.”
“어쨌든간에!”

 잡화점에서 반쯤 쫓겨나듯 나온 제로니모는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 들었다. 비단,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제로니모는 다른 사람이 비키라며 어깨를 슬쩍 밀칠 때까지 한참을 잡화점의 문간에 우뚝 서있었다. 

 저택에 도는 불손한 소문들, 마리야가 불현듯 비수처럼 던지고 간 그 말, 고요한 물가와 같은 시온의 얼굴, 그 모든 것이 제로니모가 상상하기 싫은 어떤 최악의 형태로 짜맞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제로니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로니모는 시온에게 복종할 셈이었다. 영영토록. 그러니 시온에게, 비명에 돌아가셨다던 주인 나으리를 진정으로 당신이 죽였느냐며, 흉계를 이용해 저택을 이어받았느냐고, 마리야를 죽이려는 것도 그러한 것이냐, 그러한 것들은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제서야 돌바닥에 한참을 멈춰있던 발걸음이 저택을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해가 한참 저물어 있었다. 사용인들도 숙소로 돌아간, 어둑한 저택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전에, 주인 나으리가 살아계실 적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가 살아있을 적에는 그랬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엄하고 나쁘게 말하면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했기에, 그는 제 딸이고 아랫것이고 상관없이 쥐잡듯이 잡았다고 한다. 마님께서 어린 딸을 두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을 때부터 성격이 변했다느니, 친한 친구와 진행하던 연구가 잘못되었을 때부터 괴팍해졌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있었지만 그 원인을 정확히 알 길은 없었다. 그저 다들 늙은이의 자연재해와도 같이 개연성 없는 폭력을 숨죽이며 피해 가기 바빴다고들 한다. 

 그 가운데에서 시온만은 단 한번도 혼나는 일 없이 부드럽고 온유했다고 들었다. 분명 모두가 숨죽이며 눈치만 보던 그 때에도 제로니모가 기억하는 것처럼 완벽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로니모는 손에 들고 있던 랜턴을 들어 복도의 너머를 비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초간 그 자리에서 물끄러미, 소리가 났던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계속 고요했기에 제로니모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추운 바깥에서 한참을 걸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만 그렇다고 물건을 아무 곳에나 내팽개치고 잠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로니모는 어둑한 주방 쪽에 비어있는 물품들을 채워 넣고 나서야 숙소 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정원으로 나와 별관의 숙소 쪽으로 향하던 제로니모는 눈꺼풀의 뒤쪽으로 무언가 하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톱만 한 달빛에도 불구하고 어둑하기 그지없는 저택의 정원에서 제로니모는 스쳐 지나간 뒤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하얀 인영이 서있었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커튼과도 같은, 시온과 마리야의 희고 긴 머리카락과도 같은 하얀 인영이. 

 제로니모는 그 하얀 인영을 보자마자 무작정 정원을 달려, 우악스럽게 저택의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요란한 소리에 저택에 있을 누군가들은 잠에서 깼을지도 모르고, 고작 말단 하녀 따위가 밤중에 부산스레 뛰어다닌다며 질책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제로니모는 달렸다. 한 손에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철제랜턴을, 한손에는 다리에 걸리는 치맛단을 잡아 들고선 되는 대로 다리를 움직여 그곳까지 뛰어갔다. 

 어쩌면 꿈속의 제로니모가 그랬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에 털이 곤두선, 들판의 짐승처럼 기민한 현실의 제로니모는 바보처럼 넘어지는 일 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꿈과 달랐기 때문일까? 그 하얀 인영은 이미 사라진 뒤 오래였다. 

 제로니모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초조한 기분이 어떠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음을 알고 있다. 당장이라도 마리야가 있는 곳으로, 아니면 시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칼부림이 날 것만 같았고, 저택에 살고 있는 하얀 인영이 종국에는 두 자매를 모두 죽여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던 제로니모는 자신의 숨소리만이 울리는 복도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홱, 고개를 돌렸지만 그 곳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내가 미쳐버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제로니모의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기 시작한 하얀 인영은 아직 어떠한 일도 저지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고, 제로니모는 한참을 그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기에, 결과적으로 저택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며칠 후에 오랜만에 얼굴을 봤다, 싶었다. 마리야는 이따금 외박도 서슴찮았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얼굴을 보지 않는 날들도 종종 있었다. 이번에는 그게 약간은 길었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이 그녀는 서재의 문간에 비스듬히 서서, 제로니모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봐도 귀엽네. 오늘 밤에 시간 있어?” 
“비켜.”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것뿐이야? 매정하기는.”
“비키라니까.” 
“이것, 참.” 

 뭐가 좋은지 그녀는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이번에도 싱겁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상대해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한없이 가볍게 구는 마리야의 태도에 제로니모가 진지하게 응답해 줄 이유도 없다. 

 이따금, 시온이나 마리야가 하얀 모습으로 보일 때마다 제로니모는 내심으로 놀라곤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같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이 일어나도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 모른 체 하리라, 제로니모의 그런 생각이 깨어진 것은 어느 나이 든 하인의 실족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을 때, 제로니모는 심장이 덜걱 내려앉는 기분이 되어선 추운 줄도 모르고 잠옷 차림새로 뛰쳐나왔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인파를 밀치고 목격한 그 자리에는 머리가 희게 센, 나이 든 종자의 죽음이 있었다. 

 제로니모도 그를 알고 있다. 마치 나이 많은 커다란 테리어 견 같은 사람이었다. 한때에는 그도 꽤나 쓸모가 있었겠지만 나이가 들고 나니 도무지 젊은것들에 비해서 하잘 것 없는데다 오로지 이 자리를 오래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알아 한구석에서 그저 조용하게 자리에 엉덩이를 눌러붙이고 지키기만 하는, 그런 잔머리 없는 노인. 어쩌면 노쇠한 몸은 요령을 피울 재간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옆에서 사용인들이 하다못해 모포라도 덮어주어야 한다, 경찰이 오기 전까지 현장을 건들면 안 된다, 와 같은 이야기로 떠들고 있을 때, 제로니모는 눈꺼풀 위로 무언가 하얀 것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눈이 올 것처럼 하얗고 둔탁한 하늘. 그 아래의 저택의 창가에 시온이 서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얀 네글리제를 입고 창백한 시선을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온은 그야말로 하얀 인영 그 자체였다. 시온은 그 광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방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시온은 그저 창 밖을 내다본 것 뿐이지 않은가? 

 경찰들이 저택에 어수선히 돌아다니며 이리저리를 들쑤셨지만 결론은 실족사였다. 저택의 제일 윗층, 창고의 베란다에서 그가 담배를 피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망한 지 시간도 꽤 지난 것으로 보아 어두운 밤 중에 실족을 한 것이 아니냐며. 가족이 마땅히 없는 그의 장례비용은 시온이 내주었다. 오래된 종복의 대우는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다, 시온은 그렇게 말했지만 돈은 내주었을지언정 굳이 장례식까지 찾아가 그의 넋을 위로하는 정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죽었어도 저택의 하루는 돌아간다. 상복처럼 검은 하녀복의 허리를 졸라매며 그녀들은 이따금 죽은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 새벽에 잠이 없다더니, 밤 중에 그리 사고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사고만 아니었으면 못 해두 10년은 여기서 더 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나이 먹어서까지 일해서 무얼 해. 적당할 때 은퇴해서 가족이랑 지내지 않고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도 그랬을 텐데.” 
“지나간 이야기를 해서 무얼 하겠어.” 

 이야기들은 대체로 이렇게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흘러가기만 했다.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예요, 그 할아버지?” 
“글쎄. 나도 은퇴한 하녀장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이 저택에서 제일로 오래되었을걸. 30년은 넘게 일했다던데?” 
“그것참. 시온 아가씨가 태어나시기도 전부터 일하고 계셨던 거네요?” 
“주인 나으리 성격이 다소 괴팍했잖아. 그래서 하인들이 못 버티고 참 자주 바뀌었는데 그 아저씨만큼은 오래 버텼지. 그러니까 주인 나으리도 곁에 자주 두었는데, 주인 나으리가 돌아가시고 나선 처지가 애매해졌지.” 
“처지라 함은?” 
“암만 그래도 시온 아가씨는 한참 젊고 또 숙녀분이신데 머리가 희게 센 할아버지를 곁에 둘 이유가 무어가 있어? 나이 어린 또래의 하녀들이 훨씬 다루기 쉽지.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라고, 시온 아가씨께서도 은퇴를 묻곤 했다더라. 그런데 이 저택 말고는 갈 곳이 없으니 생각해 보겠다, 생각해 보겠다, 하다가 기어이 어이없게 죽어버려선…” 
“어쩐지, 장례식 때 가족 한 명이 안 오더라구요. 남자들은 그렇게 생활력이 없나?”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놀라기는 했어도 엄청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젊은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나이 다 든 할아버지가 죽은 건데. 그 나이 될 때까지 누구 수발 안 받으면서 봉급 받아가며 일하는 것도 복이야. 마지막이 그러긴 했어도 우리가 뭐, 누구 걱정할 형편이 되니.” 
“하긴. 그 할아버지, 있으나 마나였으니까 일에도 지장이 딱히 없었고.” 
“그런 말도 있더라? 주인 나으리가 데려간 거 아니냐고.”
“참나, 주인 나으리 돌아가신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리고 그렇게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을걸?” 

 그 무수한 이야기들 사이에서 제로니모는 다시 한번 자신이 유리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애써 모르는 척 하는 위화감들. 그러나 제로니모는 어쩐지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서 명백하게 분노를 느꼈다. 

 다름 아닌 마리야에게. 

 그것은 언젠가 느꼈던 것처럼 딱히 근거가 있거나 개연성이 마땅한 기분은 아니었다. 제멋대로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며, 과연 그 마리야라고 할지라도 화낼만한 건이었으나 마리야는 진정해, 라며 제로니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을 뿐이었다. 제로니모의 여자아이 같지 않은 거친 손은 마리야의 옷깃을 거칠게 쥐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그래? 뭐가 나 때문인데.” 
“네가 그딴 소리를 해서, 내가 정신병자가 되고 있잖아!” 
“네 신경은 원래도 쇠약했어, 제로니모.” 
“말꼬리 잡지 마!” 
“아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목소리 조금만 낮춰. 그러다가 혼나는 건 너야, 알잖아. 응? 들어줄테니까…”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기는커녕, 마리야는 그 손등을 간지럽히듯 조심스레 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훑고 제 손바닥을 겹치면서. 제로니모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하는 것이 썩 유쾌한 안색은 아니었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마리야의 멱살을 놔주기는 했다. 

 “나도 말이야, 시온에게 거짓말하면 가슴이 콩닥콩닥거리거든. 두 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간 곤란해.” 

 두 번. 그래, 예전에 제로니모가 마리야의 뺨을 올려붙였던 것이 시온의 귀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리야가 어찌 말했는지는 몰라도 제로니모는 딱히 문책을 듣지는 않았는데, 하녀들이 수군거리며 떠드는 것을 보면 얼추 상황을 모를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까지 포함해서 마리야에게 명백한 분노가 느껴졌다. 제로니모는 입을 다물고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마리야를 노랗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더라?”
“모르는 척 하는거야? 죽어!” 
“정말로 죽으면 곤란해할 거면서. 귀엽게 구네, 제로니모.”
“죽으라고!” 

 마리야는 눈을 굴리다가, 아, 하고 짧게 탄성음을 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를 외마디 소리였다. 

 “그 말 때문이었어? 시온이 날 죽일지도 모른다고.” 

 제로니모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명하게 노려보는 시선은 마치 거기에 대해 더 해명하라고 따져 묻는 듯했다. 그런 제로니모와 달리 마리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으슥한 창고 안, 언젠가 늙은 종복이 담배를 피우다 죽었던 그 창고 안에 어린 여자 특유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로니모, 정말이지, 귀엽기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있어…?” 
“아아, 일단 이야기 좀 들어봐. 얼마나 심각하게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래… 왜, 애들이 사고치면 ‘난 이제 엄마한테 죽었다.’고 말하곤 하잖아. 그런 의미였어. 사고를 좀 쳤거든. 음. 그랬어. 무슨 사고였는지까지 이야기해줄까?” 
“말해.” 
“네가 시온에게 이야기 안 한다고 말한다면.” 
“말하라고.”
“고집스럽긴.” 
“...”
“유부녀랑 바람 피웠어. 난 억울해, 그 여자가 유부녀인지 몰랐다고. 그래서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줄행랑을 치긴 했는데…”
“닥쳐!” 
“네가 말하라며…” 

 느슨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끝을 흐린다. 그 여유작작한 태도는 제로니모를 언제나 열받게 했고 이번에도 조금은 그랬으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던 긴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아 제로니모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 얌전한 모양새에 마리야는 손을 들어 제로니모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리깔은 시선, 조근조근한 목소리. 네게 호의를 품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 태도. 

 “내가 죽을까봐 걱정했어?”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운이 빠진 것인지, 아니면 마음대로 오해를 했다는 민망함 탓인지 제로니모는 계속 우두커니, 마리야의 손길을 거절하지도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제로니모는 순간적으로 창고의 창문 바깥에서 무언가 하얀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내 이어지는 마리야의 어이없는 말에 그쪽을 바라보며 상념을 금세 지워버렸다. 

 “이봐, 제로니모. 정말로 걱정했던 거라면 기쁠 텐데. 그렇다면 시온에게 죽어도 약간은 보람차다고 느낄지도 몰라.”
“바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자,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온도의 손바닥이 제로니모의 뺨에 닿는다. 시선을 들면 흐르는 피마냥 생명력이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가 제로니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시온이 날 죽이려고 한다면 그 때에는 내 편을 들어줄거니?” 

 제로니모는 그 말투가 꼭 시온 같다고 생각했다. 

 “몰라.”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라 생각했지. 아무리 다정히 대해줘도 날 바라보지 않는 야속한 여인이여.” 

 과장된 어조였다. 부러 장난스레 구는 말투는 꼭 이 상황을 그저 그런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은 평소와 같으며 이상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굳이 꼬아서 생각한다면, 자신을 신경증 환자가 되기 일보 직전까지 만들었으면서 한발 물러나 버리는 태도가 괘씸하게 느껴지지도 했지만 제로니모는 이미 지쳤기 때문에 그다지 대꾸도 안 하고 창고 바깥을 나서버렸다.

 다시 일상의 시작이었다. 

 이 일대의 날씨는 춥다. 특히 아침의 공기는 더욱 그러했다. 고작 창문을 열어 아침 공기를 맞았을 뿐이거늘, 호수의 얼음을 깨고 그 물길에 얼굴을 담근 것처럼 차가웠다. 차가운 것은 이따금 물기에 젖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녀들이 하는 일은 홀의 난로에 불을 때워 그 불쾌한 공기들을 훈훈한 열기로 지워내는 일이었다. 제로니모가 매일 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책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바지런히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남으면 서재에서 책을 원껏 읽고, 시온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 수려한 옆모습을 동공의 안쪽에 새겼다. 마리야의 시답잖은 말에는 적당히 대꾸를 하며 넘겼고 잠이 들기 전에는 창밖 너머로 보이는 별을 조금 헤아렸다. 그러다가 다시 아침이 되면 난로에 불을 붙이고…

 난로에 불을 붙이고. 

 … 제로니모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하얀 인영을 바라보았다. 새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시작했지만 당장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뿌옇고 빽빽한 솜구름에 가려져 하늘은 어슴푸레하기 그지없었다. 꼭 유령처럼 하얀 그것은 그 야트막한 햇빛에도 미미하게 빛나며 계단 위에 서서 제로니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인영은 물 위를 걷는듯한 발걸음으로 제로니모의 앞으로 다가왔다. 

 “매일 네가 난로에 불을 붙였니?” 

 제로니모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턱 끝이 떨렸을지도 모른다. 

 하얀 인영은 긴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기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나는 그것도 몰랐구나. 네가 하는 일이었어. 부지런하네, 제로니모.”

  당연한 일이라는 듯, 제로니모는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는 아주 유순했다.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손가락이 제로니모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듯, 몇 번 눈앞에서 스쳤다가 사라진다. 

 “계속 이렇게만 지내면 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얀 인영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제로니모는 확신했다. 이 저택에서 시온이 모르는 일은 없다. 마리야는 언젠가 시온이 말한 대로 현명하지는 못할지언정 실로 총명했다. 

 블라디미르 가의 두 자매는 적당하게 사이가 좋아 보였다. 친구처럼 어울려 다니지는 않았지만 천상 숙녀의 모습을 한 시온과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난봉꾼처럼 구는 마리야가 같이 무언가를 도모할 리가 없었기에 ‘적당하게’ 사이가 좋게 보였다. 둘은 싸우는 일도 없었으며 서로를 대할 때에는 늘상 웃는 낯이었다. 시온이 하는 일에 마리야가 토를 다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시온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할 때에는 항상 온화했으므로 마리야를 존중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시온은 마리야가 자신과 티타임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듯 말하기는 했으나, 마리야의 성미를 생각하자면 몇십분이고 얌전히 앉아, 딱히 특별할 것도 없이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언니와 함께 찻잔을 기울이는 것은 퍽 재미없는 일이리라. 그래도 마리야가 집에 있는 날이면 아침 식사만은 꼭 같이하곤 했다. 불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환히 해가 떴을 때, 몇 명의 하인들이 복도의 문 쪽에 나란히 서서 지켜보는 시선을 배경 삼아서. 

 마리야는 식탁에 놓인 흰 빵을 손으로 적당히 뜯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시온은 한번 흘긋, 시선으로 그 모습을 흘기기만 했을 뿐 별말 없이 식기를 움직였다. 손가락에 묻은 빵조각을 입술로 한번 훑은 마리야는 몇 번 입을 다시다가 말을 꺼냈다. 

 “시온. 나, 상속권을 포기하려고.”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니?” 

 뒤에 서 있는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제히 바라보았다. 시온은 한숨을 쉬면서 손을 내저었다. 하녀들은 일제히 문 바깥으로 나갔다. 넓다란 홀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이 미처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의 음식과 함께.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마리야.”
“거짓말 아니야. 필요 없어, 아버지의 유산은.” 
“변변찮은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잖니. 아니면 혹시 내게 기대어 평생을 살 셈이니?”
“서얼마.” 

 조금 얄밉게 말을 늘리며, 마리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크리스털 잔에 담긴 음료를 쭉 마셨다. 

 “일단은 아버지가 싫으니까 그 돈도 받기 싫다, 정도로 이야기해 둘까. 언젠가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시온에게는 고맙다고도 생각하고 있고.” 
“그건 참… 기특한 마음 씀씀이로구나.” 
“응. 서류상의 절차는 천천히 하자고. 나도 바쁜 몸이라서.”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고 전해진다. 문 바깥으로 나간 하녀들이 문틈에 귀를 대고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은 대체로 위와 같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말이 마냥 뜬소문만은 아니었는듯, 바깥에서 변호사나 세무사니 하는 사람들이 부산스레 찾아오기도 하였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귀한 물건들을 대단치도 않다는 듯 두른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후자의 인간들은 대체로 마리야와 시온의 친척 되는 사람들이었다. 

 자매들의 아비가 살아있을 때부터 왕래라고는 일 년에 한두 번이나 할까 싶었던 나이 든 친척들이 아직은 젊고 어린 여자에게 호통을 쳐가며 하는 소리란 고작 결혼은 언제 할 것이냐, 상속 문제는 쉽게 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위의 것으로 그들은 한 때 집안의 어른이 차지하고 있던 고저택을 새파란 여자애에게 영영 넘겨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입을 열 때마다 마리야와 시온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얼마나 고매했으며 가족들의 존경을 샀는지 말했다. 또 그에 비해 두 자매가 얼마나 어리석으며 우매한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자매의 아버지는 항시 거룩하고 의인된 자요, 두 자매는 롯의 친딸들과 비견될 수 있었다. 

 특히나 품행이 유독 방정했던 마리야가 그들에게 붙잡혀 잔소리를 듣곤 했다. 마리야는 되는대로 아무 소리나 지껄이며 그 자리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이러려고 시온에게 그런 말을 한 건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막 그런 곤란에서 빠져나와 불평불만을 하는 마리야 이바노프 블라디미르. 딱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작해야 책장을 넘기는 무심한 소리 정도. 그러나 마리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재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절거렸다. 

 “귀찮은 일들은 피하고 시온에게 대충 다 맡겨놓고 싶었다고. 그래서 상속도 포기한다고 한 건데!” 
“그런 이야기, 내 앞에서 해도 되는 거야?”
“제로니모 양은 입이 무거울 거라고 믿어. 그리고 뭐, 다들 앞에서 대놓고 떠들지 않아서 그렇지 은연중에 알고 있더만.” 
“... 머저리.” 
“엥?” 
“그야 모두가 있는 앞에서 그리 말한 건 너니까.”
“방금 머저리라고 하지 않았나?” 

 마리야는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턱을 문지르며 눈썹을 삐뚜름히 든 표정을 짓더니, 그녀는 제로니모가 읽고 있던 책을 휙 빼앗아 들고는 그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 
“이봐, 그러지 말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 이야기 먼저 들어봐.” 

 채근하는 투에 제로니모가 입을 모나게 다물었다. 

 “하녀들 중에서 말이야, 프레데리카라고… 있지 않아? 조금 나이 어리고 갈색 머리카락을 한 귀여운 애."
"..."
"친해지고 싶단 말이지… 그런데 집안에 늙은이들이 갑작스레 들어차가지고는 여기저기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으니 말을 걸 수가 있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듣자 하니까 아침에 제일 일찍 일어나서 난로를 켜던 것이 너라며? 걔랑 당번 바꿔주면 안돼? 딱 하루만이라도 좋아."
"..."

 확실히 그때에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번, 너울거리는 흰 시트처럼 하얀 시온을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그 뿐이었다. 

 "어라. 설마 질투하는 건…"
"바꿔줄 테니까 귀찮게 굴지 마!"
"좋아. 나중에 톡톡히 사례할게. 아, 그리고 이거 들키면 안 되는 거 알지? 또 여자한테 손댄 거 들키면 나 정말 이 추운 날씨에 쫓겨난다고."
"죽든가."

 퉁명스러운 대답만을 남기며 제로니모는 서재에서 나섰다. 당번을 바꾸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프레데리카는 아주 순진한 여자애여서 마리야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반색을 하며 기뻐했다. 오히려 제로니모에게 고맙다고 말할 정도로.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이었다. 마리야가 하녀들에게 추근덕대는 일은 늘상이었다. 그러니까 제로니모도 프레데리카도, 어쩌면 시온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어땠던가? 저택을 수도 없이 오가는 손님들 탓에, 이전보다 훨씬 쉽게 지저분해지는 로비를 제로니모는 강박으로 청소하기 바빴다. 어쩌면 시온이나 마리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내내 나무 마루를 쓸고 물걸레질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제로니모는 자신이 이렇게나 열심히 청소함에도 불구하고 흙 묻은 발로 무신경하게 저택에 들어서는 손님들이 야속해지기까지 했다. 아니 실제로도 그들이 다소는 미웠다. 

 그들은 손님이라기보다는 고급 레스토랑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암행 평가원처럼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찾아대곤 했다. 어린 여주인이 다스리는 저택은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아 어딘가 지저분하거나 방정맞을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도 하인들은 몇 번이나 블라디미르 가의 인척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종복을 함부로 혼내키는 것은 분명한 무례였으나, 그들은 인척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행위들을 서슴없이 해댔다.

 제로니모는 시온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싫었다. 먹칠을 할 바에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했다. 시온을 모욕하고 흠을 잡으려 혈안인 그들에게 어떠한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다. 

 “거기 너, 이리 와보렴.”

 그리하여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홀의 청소에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던 제로니모는 그 간드러진 목소리에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온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의 앞에서도 불손한 제로니모가 볼이 움푹 파인, 벨벳으로 몸을 감싼 중년 여성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다행인 건 그 귀부인은 제로니모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알프레드가 통 보이지를 않던데. 일을 그만두었나?”
“아뇨, 그는…” 

 귀부인은 눈썹을 모나게 들며 제로니모를 흘겨봤다. 제로니모는 입안에서 몇 번 말들을 고르다가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두운 밤 중에 실족을 하여서 비명횡사하였습니다.” 
“세상에나!” 
“... 나이가 들었으니까요. 몹시도.” 

 어쩐지 제로니모가 대신 변명을 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에는 제로니모 나름의 행간을 담았다. 나이가 들었으니 필시 밤눈이 어두웠을 것이며, 넘어지는 육신을 붙잡지도 못할 만큼 둔했으리라고. 몹시도 나이가 든 이들에게 그러한 죽음이 아주 유별난 일만은 아닐 것이라며. 

 그 뜻을 알아들은 것일까? 귀부인은 이내 놀란 표정을 지우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알프레드는 내 오라비를 가장 오래 모시던 종복이었지. 시온에게 있어서는 아저씨와도 다름없을 사람이었거늘, 그 아이는 어찌 그리 사람 보살피는데 각박했을고. 나이가 들었다면 좋은 집을 얻어다 편안히 지내게 해주지 않고선. 그게 일찍 간 제 아비에 대한 효도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한 걸까?” 
 
시온은 그에게 몇 번이나 은퇴를 물었다, 그리 말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귀부인은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맡겨만 두었더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알프레드가 살아있었다면 꼭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시온, 저 아이가 집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과연 그 발언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 다소 이상한 소리였다. 제로니모가 뭐라도 되묻기도 전에 귀부인은 발걸음을 돌려 또각또각 멀어졌다. 애초에 그 자리에 제로니모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제로니모는 투덜거리며 귀부인의 발걸음 자국을 빗자루로 문질러 닦았다. 유리가루가 배어난 것처럼 반짝이는 벨벳을 두르면 무얼 하나, 그 몸은 쇠죽도 못 얻어먹은 마냥처럼 깡마르기만 했는데. 그에 비하면 시온은 얼마나 고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러다가 다시, 언젠가 스쳤던 창백한 하얀 인영을 떠올리곤, 제로니모는 다시 묵묵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새벽 중, 당장이라도 꺼질듯한 갸냘픈 비명이 복도 너머로 울렸다.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다 몸을 간신히 일으킨 마리야의 입가에서는 그녀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색의 액체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리야의 눈동자는 그 몸 안에 흐르는 피를 그대로 비추는 듯 새빨간 색이었다. 타오르는 생명력 같기도 하고 몸 밖에 비쳐져서야 불길하기만 한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색. 

 가엾은 프레데리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선배들의 품에 안겨 눈물을 짓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벽처럼 주위를 감쌌다. 구름 낀 하늘의 어슴푸레한 새벽 햇빛을 등진 채로, 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광경을 얼음장처럼 시린 눈으로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그 시린 시선에 나서지 못하고 그저 어쩌지, 하머 수군댈 뿐이었다. 찰나에 인파를 헤치고 한 노파가 나섰다.

 모피를 두른 노파는 분노를 참지 못한듯, 계단 위의 하얀 시온에게 대고 외쳤다. 주름지고 마디가 툭 불거진 손가락이 계단 위에 희게 존재하는 시온을 무자비하게 가리킨다. 

 "감히, 사생아 년이…!"

 그 사이에서 제로니모는 상당히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떠올린 직후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찌 떠오르는 생각마저 막겠는가. 그러니까 시온은 그 재수 없는 잡화점 주인장이 되는대로 떠들었던 것과 달리,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였던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긴! 

 결과적으로 이 일은 어떻게든 마무리되었다. 블라디미르 가의 인척들은 아주 잡아먹을 듯이 집안을 들쑤셨지만 모든 것은 오해였다는 것으로, 되려 부상을 입은 마리야의 중재 하에 이번 일을 덮기로 협의했다. 대신에 상속에 관한 문제는 무기한 연기. 마리야가 몸을 회복하는 동안에는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저택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저택이 떠들썩한지는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금새 다시 평소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제로니모는 홀의 청소를 더 이상 강박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큼은 기뻤다. 그 이외에는 단 한 가지도 좋지 않았다. 

 침대에선 심심해서 할 게 있어야말이지. 마리야는 머리에 붕대를 두른 채로 책을 몇 권 집어 들며 말했다. 그 얼굴엔 언제나와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프레데리카에겐 미안하게 됐어. 나 원 참, 그렇게나 이른 시간에 시온이랑 마주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별일 아니었어. 그냥… 시온이 친척들이 다 와있는데도 또 여자애를 꼬시려고 한다느니, 말을 얹어서 말이야. 내 딴에는 잘 설득하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정신이 팔려서 발을 헛디뎠고, 그를 오해한 고모가 와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시온이 곤란하게 되었다… 그거지."
"..."
"어라, 혹시 화난 거?"
"몰라. 저리가."

 한결같은 태도에 마리야는 하하, 소리내어 웃었지만 이내 골이 울리는지 아야야, 엄살을 부리며 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튼 별일 아니었으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너는 내가 바보 같아?"

 뜬금없는 소리에 마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왜. 뭐가 또 마음에 안들어?"
"내가 아주 머저리 천치처럼 보이나 보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데, 아, 그래, 그랬구나, 하며 넘어가줄거라 생각했어? 그날, 그 애랑 당번 바꿔 달라고 한 거. 일부러였잖아."
"아니, 난 프레데리카가 정말로 귀여워서…"
"프레데리카, 그래. 귀여울 수도 있겠지, 그 심약한 애는. 벌레만 봐도 금방 저택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애니까. 하지만 난 아니거든. 벌레는커녕 시체를 봐도 소리 지를 일이 없으니까." 
“생각이 과해.”
“내가 피해망상이라도 앓고 있다는 거야? 모두의 앞에서, 네가 피해자인 형태로, 시온의 출생에 대해서 폭로하고 싶었던 거잖아! 저열해, 끔찍할 정도로!” 

 제로니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 바깥으로 나섰다. 등 뒤로 선연한 목소리가 꽂힌다. 

 "그게 아니야. 네가 비명도 안지르는 귀염성 없는 여자애라서 프레데리카와 당번을 바꿔 달라고 한 게 아니야.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 너는 시온을 아주 좋아하니까.” 

 잠시 발걸음이 우뚝 멈췄지만, 제로니모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어린애를 어르는 듯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시온을 우연히 만났다는 건 정말이야. 시온은 추운 걸 지독하게 싫어하거든. 일찍 일어났어도 난로를 켜기 전까지는 굳이 나오지 않아."
"..."
"오죽하면 알프레드, 그 할아버지가 실족해서 죽었을 때에도 창문에서 멀거니 보고만 있었겠어?"

 그제서야 제로니모는 자신이 속단했음을 깨달았다. 왜 나는 그것을 시온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시온이 아니었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이번에도 침묵하기를 택했다. 하얀 인영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저택의 하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흘러간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듣지 못한 척하는 이들이 비단 제로니모 한 명뿐일 리가 없다. 실족한 늙은 종복이 왜 죽었는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제로니모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간만에 볕이 든 날, 다시금 빨래를 널면서 제로니모는 멀거니 생각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시트의 너머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어렴풋한 인영. 하얀 인영은 그들 중에 있을지도 모르며, 백지장처럼 흰 머리칼을 가진 자매들의 것일지도 모르며, 그것도 아니라면… 

 … 

 아니,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제로니모는 마른 팔에 어울리지 않는 억센 손아귀로 물 먹은 빨래들을 들어 줄에 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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