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왼쪽.PNG
헤더.PNG
캐스트.PNG
캐치프레이즈.PNG

늦은 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숲속의 오두막은 손님이 뜸했다. 장작을 갈아주는 할아버지나 끼니를 챙기는 할머니, 종종 얼굴을 보러 오는 부모.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의심을 모르고 문을 열어 낯선 이방인을 맞이했다. 첫 번째 귀접, 마술사가 되기에는 연약했던 아이의 죽음과 재래, 마탄의 사수의 생일이었다. 죽은 자는 삼하인에 맞춰 돌아온다는데 죽음을 건너뛰고 혼 자체가 변질하는 죄악은 선악과의 씨앗과도 같다. 뒤틀림은 끝내 섭리와 육신을 영원토록 작별시켰고 사수는 일평생 제 몸을 총알받이로 사용했다. 
과거를 딛고 현재. 요즘은 한 사람만을 위해 차를 끓이고 장을 보며 케이크를 내어오는 일상이다. 헌신적인 몰이해를 관두고 선택한 삶은 나태를 재촉하며 이기심에 휩싸이길 종용했다. 세상의 뜻보다 자유 의지를 앞세워 평범한 인간처럼 실수하기를, 방황하다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고 평범한 이튿날을 맞이하도록. 내가 일방적으로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다며 복수 아닌 복수로 동거인을 품에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도록. 카스파는 제임스와의 키 차이를 이용하여 종종 애정 어린 장난을 쳤다. 잊거나 잊으려 했던 인간의 삶과 맞닿자 굶주렸던 댐이 터지며 온정을 갈퀴로 긁어모아 취했다. 허기를 처음 배운 낯선 기분. 매일이 지금과 같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생 끝물의 소원. 영혼의 시간이 양극화되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돌이키자면 방심했다는 말 외에는 유구무언이다. 잠시 외출한 동거인이 돌아온 줄 알고 카스파는 또다시 쉽게도 문을 열어주었다. 녹색 눈과 마주친 순간 환영 인사도 맥없이 끊겼다.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우린 모두 인정했어.”
“난 악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몸. 그는 부족한 제 일부를 찾아 강림했을 뿐.”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민데. 모리아티가 찻잔을 비우자 금방 오른편의 카스파가 홍차를 따랐다. 교수는 잔을 벽에 던지려 고민하다 그마저 귀찮아서 관뒀다. 대신 고개를 들고 똑 닮은 두 인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눈이 마주치자 한쪽에선 여유로운, 반대쪽에선 곤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다지도 분간이 쉬우니 네가 아는 사람을 맞추라는 수수께끼는 아닐 것이다. 
“이렇듯 완전히 갈라져 버렸어. 당신 덕이야, 제임스 모리아티.”
“한 세계에 같은 영기가 둘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고. 다른 영령이라면 모를까, 난…….”
소파 왼쪽 턱걸이에 팔을 걸친 악마가 웃음 짓는다. 그 이름 자미엘, 세계의 적으로 단죄당한 카스파의 반쪽. 자체로 욕망을 상징해선지 죽은 자가 돌아오는 괴물의 밤을 기념해선지 악마는 잉글랜드의 사과나무 아래로 친히 현현했다. 오른편에 반듯이 앉은 사냥꾼이 제임스에게 익숙한 형상으로 활잡이이자 인리의 수호자였다. 하나의 영혼이 둘로 나뉘어 멸망의 원인을 도맡는 동시에 자살을 강행함이 마탄 전설의 시작. 두 사람은 테세우스의 배를 비롯한 많은 논리적 문제를 뛰어넘고 백 퍼센트 동일 인물이었다. 사냥이 미뤄질수록 같은 영혼이 서로 다른 위상좌표에 공존한다는 모순이 커져 섭리가 비틀렸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불투명했다. 당장이라도 한쪽을 저버리지 않으면 모두가 인리의 손길로 소각될 것이다. 모리아티와 카스파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할라 치자 악마가 노골적으로 존재를 드리웠다. 
“왜 이렇게 뜸 들여. 답도 정해놓고선.”
“기회는 한 번뿐이잖아? 난 계산을 좋아해.”
그 말대로였다. 제임스 모리아티는 답이 떨어지는 학문을 고집했으므로 완전히 제 맘에 들어맞는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책갈피를 꽂아두고 오래 골몰했다. 막 명제에 드리운 함정을 파악한 차였다. 하나를 죽여 버리면 남은 하나도 반쪽 영혼으로 전락할 테니 안정적인 미래가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카스파의 욕망을 담당한다고.”
“맞아. 나는 카스파의 소원을 들어주러 찾아왔던 악마. 그 애는 혼자가 아니길 바랐고 그래서 여생을 나와 함께했지.”
“조용해.”
“혹자는 악마가 욕망의 비유라고 봐. 틀린 말은 아냐.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마음을 꿰뚫으며 살아가니까. 심장에 기생하는 내내 변이와 진화를 거쳐 진정한 탐욕만을 응집시키지. 그로서 귓가에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린다. 얘, 마탄을 내어주면 즐겁지 않겠니. 널 두고 행복해진 둘을 징벌하자꾸나.”
“닥쳐, 자미엘.”
“그 이름은 오래전 버렸어. 카스파. 난 또 하나의 너야.”
“제임스. 총 줘.”
“그건 안 돼 카스파.”
다른 누가 아닌 제게 주어진 카스파를 쏠 권리가 마음에 들었다. 또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하겠는가. 부끄럼 타던 사냥꾼의 본성이 까발려지며 검붉은 과실이 드러났다. 끓는 열기로 김이 피어올랐다. 제임스는 시간제한까지 이 무대를 즐길 작정이었다.
“그럼 내가 둘 중 진짜를 찾아낼 때까지 질문에 대답해.”
“얼마든지.”
“제임스, 단둘일 때 대답할게. 응?”
“안 돼. 카스파는 지금까지 숨겼잖아? 걱정 마. 별 거 아니니까. 우선 어제 저녁 메뉴부터 말해볼까?” 
“레몬을 뿌린 생선구이와 미트 파이였어.” 수호자가 재빨리 답했다.
“맞아. 그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타인 중에 고르라면 셜록 홈즈지.” 악마가 자기혐오를 되물었다. 모리아티는 대답을 생략한 채 페이지를 넘겼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야. 카스파~ 날 동정한 적 있어?”
말문이 막혔다는 표현이 옳았다. 욕망과 이성 모두가 침묵했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는 들키기 싫다는 욕망이 선행하므로 제임스 모리아티는 자미엘조차 입을 다물 강력한 패를 내려두었다. 체스라면 체크메이트. 이제 격자무늬의 어느 방향으로 말을 올리든 집어 삼켜진다. 그 탓인지 카스파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어차피 털어놓아야 한다면 직접 말할게.”
“좋아, 카스파.”
“방금 질문은 때를 노리고 있었지.”
“응. 눈치챈 지 꽤 됐어.”
시간이 부족했다. 언제인지를 묻기보다 대답을 우선시할 때다. 일곱 탄환을 세며 살아서인지 생명의 목울대를 겨누고 숨죽인 채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방아쇠를 당겨와선지 카스파는 시간 계산에 능숙했다. 자신은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혀 직접 살해당하고 부활하기를 수십 번 반복한 악마. 무조건적인 끝이 다가오더라도 정말 두려운 것은 종말이 아니었다. 공포는 이어질 대답이 여태껏 함께한 시간을 망가트리란 확신에서 비롯했다. 잠깐. 난 늘 용사를 배신했는데? 그렇다면 사실 매번 속상했구나. 아니면 당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라 비슷한 상황을 겪어 왔음에도 유독 참기 힘든가 봐. 외롭기 싫다는 감정과 외롭게 만들기 싫다는 감정이 마탄과 사수처럼 공존했다. 고독하기 싫어서 함께하고 싶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로운 허기를 채우려 소중한 손을 잡았다. 내가 이기적이라, 당신을 골랐기 때문에, 악마는 내가 자신을 잊기 시작하자 벌을 내리러 분명 여기까지 찾아왔어.
그러니까 부디 속지 말라는 부탁은 질문의 답으로선 부적절하다. 제임스 모리아티는 구태여 최악의 답만이 옳은 답으로 뒤바뀌도록 물었다. 어느새 총구는 카스파를 겨눴고 오랜 추억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졌다. 총성이 들릴 즈음 마탄의 사수는 자연스레 고별을 연상했다. 한번 자기를 쏜 사람과는 아무리 세계를 거슬러 올라가도 재회할 수가 없었다.
“당신의 영혼을 채우고 싶어. 내가 불필요해질 만큼.”
동시에 악마가 웃었다. 마지막에는 거짓말을 일삼는 고루한 습관을 비웃었다. 카스파, 넌 이 자가 앞으로도 계속 네가 필요하도록 길들이지 않았니. 올바른 답과 욕망이 상충하자 끝끝내 도망쳐 버렸구나. 탕! 곧 하나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교수와 악마가 나란히 섰다. 

악마가 느른하게 웃었다. 제임스 모리아티도 웃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아 침묵이 지나갔다. 지난날의 악마는 간사한 목소리로 타인의 마음을 휘둘러댔고, 과거의 제임스는 교활하게 사람을 끌어내리며 내키는 대로 충동질했다. 그리고 남는 건 순간의 재미, 짧은 쾌락, 아주 길고 긴 무료. 시체는 말이 없었고, 자신을 위한 극이 끝나면, 다시 커튼이 올라가기 전까지 남는 건 적막뿐이었다. 이미 지나간 극을 두고 떠드는 건, 악마의 취향도 제임스의 취향도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둘 다 입을 열었다. 퍽 닮은 꼴이었다.
“그렇게 웃지 마. 카스파는 그런 식으로 안 웃어.”
“이제 와서 무슨. 그것보다, 눈치챘잖아.”
“응, 알고 있었지.”
제임스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수였다. 언제나 맞는 답만을 고르고 채점했다. 다만 지금, 처음으로 세상이 말하는 ‘올바른 삶’에서 벗어나 오답을 선택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검은 구두가 움직인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어 구두 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체의 머리맡으로 가 웅크리자, 벌써 갈색 머리카락이 희미해져 너머의 카펫이 보였다. 제임스는 이제 웃지 않았다. 대신 무감각한 표정으로 카스파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근데 왜?”
악마 또한 답을 알고 있었다. 제임스 모리아티가 뻔히 정답을 알면서도 오답을 고른 이유가 뭐겠는가.
“…당신이 찾아온 순간 느꼈어. 이런 일상 같은 거, 우리가 겨우 쥐었든 말든 세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겁쟁이.”
“나는 타의로 무너지고 싶지 않아. 망친다면, 내 손이 낫지.”
“후회할걸.”
“이미 후회해. 알면서도 했어.”
“하하…”
“됐으니까 빨리 사라져. 꼴도 보기 싫어.”
악마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알면서.” 악마의 갈색 머리카락 너머로 벽의 벽지가 흐릿하게 비쳤다. 제임스는 조금이나마 선명한 카스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눈에 새기고 또 새기다가 마술로 그를 소파에 앉혔다. 악마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카스파의 삶을 망쳐서 꼴도 보기 싫어… 라고, 솔직하게 말해주지 그랬어. 그가 살아 있을 때.” 악마는 좀 더 희미해져, 이제 몸 너머로 보이는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제임스는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래도 당신 덕에 카스파랑 만났으니, 조금은 고맙네.” 악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탕! 하나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 똑같이 생긴 시체가 쓰러졌다. 이번에는 제임스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은 탄환은 하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의 거짓말과 입놀림으로 칼데아의 기술을 빌려,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결국 체코와 독일의 경계. 통칭 보헤미아 숲. 카스파가 생전에 살았던 곳이었다. 카스파가 지내던 마을, 집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생긴 구덩이 하나가. 그 안에는 사람이 둘은 누울 수 있을 법한 관이 놓여 있었다. 제임스는 관에 카스파를 누이고, 자신도 나란히 누웠다. 마모된 옆면이 꼭 절벽 같아서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떨어지던 날을 상기시켰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좁은 시야로 구름이 흘러갔다. 구름이 느리게 지나가자, 초승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언젠가 카스파가 보여줬던 과거의 풍경과 비슷했다. ‘마술을 배워둬서 다행이지. 이렇게 쓸 줄은 몰랐지만.’ 뚜껑이 닫히고 그 위로 흙이 덮였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지면의 아래, 제임스는 사라질 듯한 손을 쥐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었다.
“카스파. 정답을 말할게. 둘 다 너야. 그러니 욕망을 긍정해. 네 이기심을 부정하지 마. 그렇게 한다면 나는 언제나 네가 그랬듯이, 너를 받아들여 줄 테니…”
그러나 이제 청자는 없다. 모든 기회를 날려버린 건 제임스 모리아티였다. 굳이 틀린 답을 골라 망쳤다. 한 명을 선택한 이상, 카스파의 일부는 부정당한다. 그러니 양쪽 다 사라지는 결과는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알면서도 제임스는 제 손으로 카스파를 죽였다.
듣는 이 없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내 첫 살인이 당신이야. 이런 말을 하면 기뻐할까?” 당연하게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길들여진 범죄계의 나폴레옹은, 더 이상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 대신 끊임없이 불안에 잠식되면서도 살아가는 법을 익혔고, 그럴 때는 곁에 있는 이의 온기에 기대면 된다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유일한 이해자가 사라졌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철컥, 남은 탄환은 하나. 당연하게도 쏠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마탄의 사수, 그 악마에게서 받은 총이었다. 마지막 탄환은 총을 쥔 사람에게 돌아감이 옳았다. 제임스는 자신의 입 안에 총구를 밀어 넣고, 각도를 조절했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삶. 심지어 영령과 수호자라는 점까지 달랐다. 제임스는 막연히 생각했다. 처음이 다르다면, 마지막만큼은 같아야 하는 게 아닐까. 모든 카스파를 독점할 수 없다면, 이번의 카스파 만큼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시간이 부족한 탓에 ‘제임스 모리아티, 카스파, 2023년 10월 31일, 여기에 묻히다.’라고 적힌 석판을 놓지 못한 게 아쉬웠다.

탕,
총성에 새들이 날아올랐다.
수복되지 못한 영령의 몸은 빠르게 좌로 돌아간다. 기이하게도 그 덕에 속도가 맞았다. 제임스와 카스파의 몸은 점차 투명해지며 서로를 통과했다. 곧 잡고 있던 손이 느리게 겹쳤다.

두 사람이 묻힌 곳에는 묘비 대신 사과 하나가 놓여있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