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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AWE-16: <저택>

격리 절차: 평소에는 잠가 놓는다. 1년에 1번 정해진 날, 지정된 열쇠를 이용해 저택의 문을 연다. 1층, 2층, 지하실의 방을 가장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순서대로 문을 한 번씩 여닫는다. 이곳을 아직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만일 위의 격리 절차를 수행하지 못했다면...

설명/변성 효과: 사람들의 흥미와 공포심을 자극하는 낡은 저택의 원형 그 자체. 판타지적인 심상이 섞여 다소 고전적인 풍경의 이 저택은 격리 절차만 무사히 수행한다면 평범한 저택처럼 비칠 것이다. 그러나 격리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면, ■■■■ ■■■ ■■■■■ ■■■■■ ■■■ ■■■ ■ ■■■■ ■■■ ■■■ ■ ■■

배경: 1910년대 매사추세츠 주 시골 마을에서 처음 발견된 저택. 발견됐을 당시에는 거대한 목조 저택의 느낌이 짙었으나, 사람들의 심상이 발전해나감에 따라 매년 모습이 조금씩 변화되었다. 사람을 불러 집어 삼키는 저택 괴담 속 저택의 원형으로, 이동하는 일은 없어 매년 요원을 출장보내는 것으로 격리 절차를 수행한다. 

 

 

 

10월의 매사추세츠, 저택 앞.

두 명의 통제국 요원이 문 앞에 대기중이었다. 트루스 로 상사와 글로나스 A. 체르노미르딘 중사. 두 사람은 각각 무장과 도구의 점검을 마친 후, 저택의 문에 손을 얹었다. 트루스가 말했다.

“자. 녹음기 켜라. 기록 남겨야지.”

“네. 진입하겠습니다.”

트루스와 글로나스는 저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목적은 간단하다. 변성 세계 사건 <저택>의 격리 절차 수행. 저택의 문을 한 번씩 여닫기만 하면 되는 아주 심플한 작업이었다. 글로나스의 녹음기는 작업의 증거를 남기기 위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선두에는 트루스가. 후열에는 글로나스가 자리잡았다.

끼이익.

두 사람이 저택에 전부 발을 들이자마자, 음산한 소리와 함께 목조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퀘퀘한 냄새가 두 사람의 코를 찔렀다. 2층짜리 저택다운 높은 천장, 곰팡이가 핀 벽지와 먼지 쌓인 목조 계단. 두 사람은 사전에 전달받은 정보를 복기했다. 낡은 저택이지만, 관리는 잘 되어 있다고 했었는데. 어쩐지 서늘한 공기가 피부결을 스치는 순간, 두 사람은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넘버링 AWE-16: <저택>에 관한 보고서

 

저택 1층, 로비.

작년의 격리 절차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음을 깨닫자마자, 두 요원은 당장 저택의 문에 매달려 미친듯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당연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저택에 갇히게 된 것이다. 영화였다면 진부할 정도로 전형적인 연출이겠지만… 이곳은 실존하는 두 사람의 세계. 클리셰라는 이름의 연출은 불안함을 두른 예고로 작동한다. 문이 열리지 않음을 거듭 확인한 두 사람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좋아, 예상대로 나오는군.”

“예상하셨으면 진입할 때 문에 뭐라도 끼워놓으시라고요.”

“그래봤자 밖으로 튕겨냈을 걸. 전형적인 호러 영화 처럼.”

아직 농담따먹기 정도는 가능한 상태인지, 트루스의 목소리는 퍽 여유로웠다. 비록 계단은 오를 수 없이 다 망가져 있었고, 천장에는 거대한 거미줄이 먼지와 함께 벽에 늘러붙었으며, 정면의 기둥에 붙어 있는 사슴 머리 박제는 벌레가 파먹어 썩은 상태였지만. 놀이공원의 할로윈 테마 어트랙션 정도라고 생각하면 나름 봐줄 만한 정도였다.

긴장감을 떨쳐낸 글로나스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트루스는 베테랑다운 배짱으로 답했다.

“새 변성 사건 대하듯 조사해봐야지. 녹음기는. 멀쩡하지?”

“예. 다행이네요.”

“상세하게 기록해. 따라와.”

“네. 1층 우측 복도로 진입합니다. 기록자는 글로나스 A. 체르노미르딘, 중사. 동행인은 트루스 로, 상사. 사전에 전달받은 정보와 다른 점을 발견해 격리 절차 수행이 아닌 조사로 작전 내용을 변경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막힌 저택 어딘가에서, 불길한 공기의 흐름이 두 사람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저택 1층 우측 복도, 응접실.

우측 복도로 진입했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방은 응접실이었다. 은은한 조명이 비췄을 응접실은 쓸쓸하다못해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방의 한쪽 모서리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위치했고, 그 앞으론 티 타임을 가질 수 있는 낮은 목제 테이블이 자리잡았다. 테이블을 둘러싸듯 놓여진 크림색 소파는 먼지로 뒤덮여 있었으며, 테이블 위의 찻잔 세트는 창백한 상아색이었다. 글로나스는 이 모든 풍경을 녹음기를 통해 언어로 상세하게 묘사했고, 그동안 트루스는 시계의 안쪽이나 테이블의 위를 뜯어보고 있었다. 성실하게 주변을 살피던 트루스는 문득,

“엇.”

하고 무언가 발견한 것처럼 짧게 소리를 냈다. 글로나스는 고개를 퍼뜩 들고 트루스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거 봐. 컵에…”

테이블 위 도자기 컵에 검붉은 색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신선해 보이는 액체는 잠시 찰랑거며 파동을 만들어내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지켜보던 글로나스가 물었다.

“피일까요.”

“맛보지 않는 이상 모르겠지. 일단 피비린내는 확실하군.”

“으음.”

짧게 침음하던 글로나스는 나직하게 녹음했다: 혈액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찻잔에서 차올랐다. 그 외 특이사항 없음.

트루스는 녹음기에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었다.

“옆 방으로 가 보지. 여긴 별거 없군.”

“네.”

두 사람은 별 소득은 거두지 못한 채 응접실을 나섰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은 의식적으로 외면하면서.

 

저택 1층 우측 복도, 서재.

코너를 돌면 꽤 넓은 공간의 서재가 나타났다. 이중창 구조의 서재는 창문의 일부가 안쪽으로 깨진 상태였다. 마치 돌풍에 습격이라도 맞은 것마냥 어지러운 모습이었는데, 바닥에 널부러진 책들이 그 정돈안된 산만함을 더욱 강화했다. 당연하게도 깨진 창문은 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힌 상태였고, 금간 곳을 두드려 구멍을 넓힐 수도 없었다. 절망하거나 놀랄 법도 했지만……. 기실 통제국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 비상식적인 일은 비일비재하다. 익숙하다고 느끼며 두 사람은 서재를 둘러보았다. 짙은 마호가니 색 책장들이 벽 테두리를 따라 배치되었다. 그 한켠에는 낡은 서랍 책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진 건 엽서 나이프나 작은 초, 깃펜과 양피지. 독특한 질감의 양피지 위에는 섬세한 모양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서를 읽던 트루스가 글로나스를 호명했다.

“체르노미르딘 중사.”

해부학 삽화가 그려진 책을 독해하던 글로나스가 트루스에게로 다가왔다. 트루스가 용건을 이었다.

“라틴어는 읽을 줄 아나?”

“전혀요. 대학 교양 수준 정도면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으음. 내가 조금 할 줄 알아서 다행이지.”

“무슨 내용입니까?”

그 말에 트루스가 담담하게 읊었다.

“……악마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은 복잡하면서도 명료하다. 인간의 고통과 타락, 그가 놀랄 만큼의 지혜와 재치. 날카로운 비명과 신음. 이 중 가장 간단한 것은 바로 인간의 피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심장에서 갓 짜낸 신선한 혈액. 혈액 2L를 배고픈 악마에게 바치면 악마는 생명력을 되찾는다. 이 부분이 아주 미묘하다. 힘을 되찾은 악마는 저택 쯤은 버리고 어디든 갈 수 있으니. 그러니 숭배자여, 악마가 떠나지 않길 바란다면 언제나 그를 굶주리게 두어라.”

“…….”

“라고. 적혀 있군. 뒷 내용은 찢어져 있고. 여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

“꺼림칙합니다. 흑마술 같은 걸까요. 저주라거나.”

글로나스는 마치 끔찍한 앞날을 엿본 사람처럼 표정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 트루스는 고저 없이 평온한 어조로 쉽게 답했다.

“글쎄다. 진위 여부는 모르겠다만, 집주인은 꽤 진지했던 모양이다. 여기 해부학 책이 많잖아.”

그렇게 말하며 트루스는 글로나스가 들고 있던 책을 가리켰다. 글로나스는 비위 상한 얼굴로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자, 트루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피와 심장 구절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단 얘기지.

“…….”

“큰일이군. 인간은 피를 2L쯤 뽑으면 죽을텐데.”

“한 명당 1L씩 뽑으면 안 됩니까.”

“아하하. 니 말처럼 간단한 수수께끼라면 좋겠지만……. 목숨을 바치란 말의 은유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네.”

“조금 더 둘러볼 필요가 있겠군.”

“알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죽음은 언제나 가깝다. 그렇지만 그게 두 사람이 죽음을 더 가볍게 논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여유로운 목소리는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어쩌면 누군가는 어떤 각오를 마쳤을 수도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재를 탐색하다 이내 방을 빠져나왔다. 

 

저택 1층 우측 복도, 거실.

낡아서 헤지고 찢겨진 커튼이 목 매단 사람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는 넓은 거실. 공간의 한켠에는 벽난로 비스무리한 게 설치되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맞은 편에는 소파와 테이블, 그 뒤로는 진열장과 화분이 늘어져 있는 공간은 묘하게 음울한 색채로 가득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로, 오래 치지 않은 건지 건반이 몹시 뻑뻑해 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글로나스가 거실을 돌아다니며 저택의 구조를 녹음하고 있던 와중, 트루스가 그에게 손짓했다.

“뭡니까.”

“이거 봐봐.”

트루스의 부름에 글로나스는 녹음기를 잠시 내려둔 채 트루스가 서 있는 쪽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장식장 앞이었다. 먼지가 쌓인 가구는 오래된 흑백 영화 필름처럼 뿌옇고 더러웠다. 트루스가 손가락으로 표면을 밀어내고서야 내부가 보였는데, 그곳에는 저울과 칼, 주사기, 그리고 2kg의 무게추가  놓여져 있었다.

…….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암시. 마치 부추기는듯한 배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 순간 울리는 피아노 소리.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낡은 피아노가 무겁게 건반을 삐걱이며 노래를 이어갔다. Cdim7에 이은 Bdim7. 어린 아이의 장난질 같은 피아노 소리가 신경을 긁어대듯 울렸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의 음악에 깊게 매료되던 두사람은, 퍼뜩 고개를 들고 정신을 차렸다. 트루스는 차분하게 한숨을 내쉰 후 장식장 안의 도구들을 챙겼다. 그러는 와중 글로나스는 문득 생각했다. 이 불협화음도 녹음되고 있을까. 파일을 재생하면 우리의 목소리만 들리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그저 미쳐가는 중인 거라면.

 

저택 1층 우측 복도, 식당과 창고.

유리는 전부 깨지고 철제 조형물만 위태롭게 매달린 식당. 중앙에 놓여진 길쭉한 직사각형 식탁에는 이상할 정도로 반짝거리다 못해 얼굴이 다 비칠 정도의 식기들이 놓여 있었다. 접시 옆에는 나이프와 와인잔이 늘어져 배치되었는데, 가장 끄트머리의 와인잔 하나를 제외하곤 전부 정체 모를 불길한 액체로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의 연출은 이제 별거 아닌 것처럼 트루스가 의자를 짚고 기대 섰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자고. 왜 이 잔만 비워져 있는지. 이 안의 액체는 무엇일지.”

“피거나, 포도주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렇지. 여기는 호러 저택이니까.”

“그럼 비어있는 이 잔은요.”

“바치라는 무언의 압박?”

“피를요. 아까부터 노골적입니다.”

“고통과 타락, 재치와 지혜. 비명과 신음. 그 사이에 끼어진 신선한 혈액 2L. 계속해서 이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지. 이 저택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 나도 당장 바칠 생각은 없어.”

“예.”

“일단 나가자. 이 잔은 내가 챙겨 두지. 말곤 별 거 없군.”

“충분히 별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트루스를 따라 나가려던 글로나스는, 무언가 턱 걸리는 기분에 걸음을 멈췄다. 마른 나무 바닥이 삐그덕대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트루스가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글로나스를 바라보았다.

“상사님.”

“응.”

“근데 왜 자연스럽게 상사님이 바치는 투로 말씀하십니까?”

“하하. 예리하군. 중사가 이렇게 의리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비꼬지 마십쇼. 임무잖습니까.”

“알아. 나도……. 무작정 전부 책임지겠답시고 내뱉는 말은 아니야.”

“그러십니까.”

“응. 설명하면 납득할 걸. 필요할 때 해 줄게. 이유가 있거든.”

“……예.”

“그래. 우리 애초에 의리를 논할 만큼 긴밀한 사이는 아니지.”

“네.”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음정을 이탈한 현악기 소리가 다시 바닥을 울렸다. 튀어나온 목조 마루를 워커로 짓누르며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두 사람은 다시 복도에 서 있게 된다.

 

저택 1층 좌측 복도, 침실

우측을 다 돌아본 두 사람은 로비의 좌측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방은 거대한 침실이었다. 부부의 것일까. 의자도, 침대도, 2인을 기준으로 배치된 가구들은 마치 장례식의 물품들처럼 고요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어찌나 깔끔한지 천들이 헤져 있고, 바닥은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기 어려웠다.

방에서도 특히 글로나스가 주목할만한 특징은 바로 침대 앞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였다. 텅 비어 있어 원래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모를 액자는 철제 끄트머리가 이미 시들어 갈변한 꽃잎처럼 부식되는 중이었다. 글로나스는 이러한 풍경을 가감 없이 사실적이게 녹음한 후, 침대 밑바닥부터 방을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비극은, 두 사람의 신경이 분산되어 있었단 사실에서 기원했단 얘기다. 

글로나스가 허리를 숙이고 트루스에게서 눈을 뗀 순간,

“음?”

트루스의 머리 위로 네모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는 점점 가까워지며 기울어졌다. 짧게 뱉은 멍청한 소리에 글로나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후. 덜컹, 하고 무언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하?”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방을 크게 울리는 커다란 타격음. 액자가 벽에서 떨어져 트루스의 머리를 날카롭게 가격한 것이다. 

“상사님!”

이윽고 이어지는 외침. 그러나 트루스는 그 소리를 듣기도 전에 액자 모서리에 맞아 즉사했다.

 

1층 좌측 복도, 여전히 침실

트루스는 즉사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존재하는 또다른 사실이 있다: 저택의 악마는 자비롭다.

“…….”

“상, 상사님… 이게 무슨, 아, 으…”

“……으음.”

그 자비 덕에 트루스는 죽은 지 10분만에 눈을 떴다. 굳었던 가슴팍이 오르락 내리락 움직이고, 자그마한 호흡을 이어가자 글로나스는 오히려 이쪽이 쓰러질 것처럼 놀라며 트루스를 불렀다.

“상사님?”

“으윽… 머리 아파.”

“무슨, 괜, 괜찮으십니까? 움직이지 마십쇼.”

눈 앞에서 동료를 잃은 글로나스는 다소 제정신은 아니었다. 트루스가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라기보단, 그의 트라우마가 직격으로 관통당한 탓이 컸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써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트루스는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왜 그러나? 사람 죽은 것처럼.”

“진짜 죽었잖아요.”

“음? 내가? 난 멀쩡해.”

“맥박이 멈춘 걸 확인했다고요. 숨도 10분 이상 멎어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트루스는 간결하게 결론지었다.

“……아무래도 이 저택에선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나 보군.”

그 말에 글로나스는 순식간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을 외면하며 트루스가 침실의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이었던 것은 깔끔하게 박살난 상태였고, 텅 빈 공간에는 어둠을 향해 뻗어 있는 돌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글로나스가 멍하게 그 계단을 바라보자, 트루스가 덧붙였다.

“지하실이 있나 보군. 액자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몰랐을 테지. 다행이지 않나?”

“다행……. 이라는 말은요.”

“응.”

“상사님이 다시 살아난 걸 두고 다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

글로나스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곧장 무너진 바닥으로 몸을 내렸다. 그닥 깊지 않은 구멍인 탓에, 글로나스는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트루스가 그의 뒤를 따랐다. 어둠 속의 굴을 손으로 더듬으며,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두 사람은 아래로 향한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향해.

 

저택 지하, 계단.

“……우리 얼마나 내려왔을까?”

“…….”

“……체르노미르딘 중사?”

“……50개정도 내려왔네요.”

“그래. 나 혼자 있는 줄 알았잖아.”

“…….”

 

저택 지하, 지하실.

당신은 악마를 마주한 적이 있는가?

이 대답에 감히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지구에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트루스와 글로나스는 오늘부로 이 물음에 쉽사리 답할 수 없을 테다. 지하실에 도착한 그들을 맞이해주는 건…

“…….” 

아주 오래 묵은 듯한 악취, 그리고 그와 대조적인 화려한 로비. 마치 저택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물건처럼 보이는 고풍스러운 카펫과 타일. 그리고…….

악마.

혹은 사람일까.

지하라곤 믿기지 않을 깔끔한 로비의 중심부에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였다. 바닥에는 기이한 원형의 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주술적인 문양이 새겨진 모습이었다. 그 안에 서 있는 건… 악마 같았다. 마치 그 진 안에 갇힌 것처럼 몸을 웅크린 악마는 붉고, 까맣고, 흰 피부를 억지로 꿰메 퀠트처럼 엮어놓은 모습이었다. 기이한 생김새에 두 사람은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간신히 억누르며 눈 앞의 생명체를 살펴보았다. 얇은 피막같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악마는…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확실하게 몸부림치는 거라고, 두 사람은 확신했다. 작은 머리카락과 40cm정도 되어보이는 기다란 목. 구부정한 상체는 평범한 인간보다 확실히 길었으며, 세심하게 짜여진 등뼈가 피부 위로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쭉한 다리는 언뜻 봐도 2m를 훌쩍 넘을 법한 길이로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잡고 늘린 것 같은 비율이었다. 전반적으로 인간과 유사한, 그렇지만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생명체. 두 사람은 완전히 압도당한 채 악마 앞에서 몸을 굳혔다.

악마가 날개를 한 번 휘젓는다. 그러자 두 사람의 옷차림이 순식간에 세월을 뛰어넘었다. 통제국의 유니폼은 전통적인 면직물로. 건 홀스터와 장비는 가죽 허리띠로. 악마의 작은 권능일까. 의문에 답하지 않고 악마는 다시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면 두 사람은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황금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인간. 기차를 타고 달리던 성실한 청년은 해처럼 밝은 금광에서 일하고 또 일해 재물을 모은다. 하지만 부푸는 재물보다 더 빠르게 커지는 건 황금을 탐하는 마음. 청년이 타락한다. 더 많은 돈, 더 더 많은 돈을 위해.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의 종착역은 대부분 비슷하다. 죽음, 아니면 죽음과 가까운 사특한 힘. 바라는 걸 가질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단 문구는 얼마나 겸손한 이야기인가. 타락한 어느 청년은 무고한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을 바느질해 악마를 만들어 부리겠단 생각에 이르렀는데.

두 사람은 악마의 탄생을 목도한다. 악마가 보내는 환상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 인간이 보이는 밑바닥을. 악마보다 더 악한 것이 존재할 수 있단 사실을. 백몇십 년동안 갇혀 있던 사특한 것의 괴로움을. 어떤 악마는 자연스럽게 태어나 우리들 틈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탈을 쓴 채로.

…….

모든 것을 이해한 트루스는 결단을 내린다. 우르릉, 쾅! 번개는 그러한 결단을 맞이하는 악마의 환영사이다. 또 다시, 우르릉, 쾅! 분명 이곳은 지하일 텐데도. 귓가에 울리는 천둥 소리가 선명하다. 굉음은 바람과 함께 화음을 만든다. 쉼표 사이로 날카로운 소음이 파고든다. 목조 계단이 삐걱이는 소리. 광목 천이 휘날리는 소리. 쇠사슬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악마의 비명소리. 불길한 저택의 중심부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는다. 도구는 얼마든지 사용 가능하다. 저울, 추, 단검, 마도서……. 저택의 주인은 자비로운 게 아니다. 자신의 해방을 위해 두 사람을 도울 뿐.

체르노미르딘은 행위를 쉽게 이행하지 못한다.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그는 거듭해 되묻는다.

“진심, 진심이시냐고요.”

“어서, 빨리!”

 트루스는 개의치 않는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경주마처럼. 글로나스는 그가 무슨 생각인지, 감히 확신할 수도 없었다. 악마를 돕고 싶은 건지, 저택 밖으로 나가고 싶은 건지. 둘 다인지. 글로나스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트루스는 바닥에 나뒹구는 단검을 쥐고 단숨에 자신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고집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행동력이 좋은 법이다.

“상사님!”

피부가 찢기고 살점이 갈라지는 감각이 선명하다. 그걸 목격한 글로나스는 바닥으로 쓰러지는 트루스의 몸을 받치면서도 헛구역질해댔다. 단순히 잔인해서가 아니다. 도덕적인 거부감. 비인간적인 장면을 목격한 데에서 나오는 경악.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남에게 의지하면서도 트루스는 팔을 움직였다. 두터운 지방은 날카로운 쇳덩이에 의해 갈라진다. 그 소름끼치는 소리의 틈으로 살아 꿈틀대는 심장이 보였다.

“뽑아서 짜내. 저울에 무게를 달고 악마에게 피를 바쳐, 어서!”

“그런 말씀을 잘도 하십니다.”

“이게 어렵나? 자르는 것까지 내가 다 했어. 피를 빼내기만 하면 돼.”

“... … .”

“안 할 건가? 이대로 여기 갇히려고?”

“살인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집 안에서는 악마의 주술 덕분에 살아있다 치더라도, 악마가 저택 밖으로 나서서 주술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당신은 죽는다고요.”

“살인자로 만들 생각도 없어. 다 생각이 있다. 그러니까. 수행해!”

“... … .”

“명령이다, 중사. 수행해.”

“... … .”

“어서.”

“... …당신은 진짜 미쳤어…”

글로나스는 떨리는 손으로 갈라진 살을 잡아 벌리고, 자신의 팔을 집어넣는다. 어찌나 크게 진동하는지 꼭 팔에 근육통이 온 사람 같았다. 집어넣은 손으로 트루스의 심장을 움켜쥐면 점막과 꿈틀거리는 근육이 살끝으로 느껴졌다. 글로나스는 조심스럽게 장기를 받쳐 들고 저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두근, 두근, 두근.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는 글로나스의 것인지, 트루스의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벌벌 흔들리는 팔은 간신히 힘을 잃지 않고 단단하게 심장을 쥐어 손 안에 가둔다.

“짜내.”

강경한 어조에 글로나스는 천천히 입을 연다.

“2021년 10월 31일자 기록. 변성 세계 사건 <저택>. 기록자 글로나스 A. 체르노미르딘. 나는 지금 트루스 로 상사의 몸에서 심장을 적출해냈고, 피를 뽑아내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직접 지시했기 때문이다. 목표는 변성 사건에서의 무사 탈출 및 통제국 귀환. 우리의 행위는 격리 절차, 혹은 나쁜 예시 사례가 될 것이라 판단하며, 혈액을 채취하겠다.”

(살이 쥐어짜내지는 소리와 액체가 저울 위의 컵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 낡은 황동 저울은 소리도 없이 균형을 잡아간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확인하며 글로나스가 계속 피를 뽑아낸다)

“……저울의 수평을 맞췄다. 채취한 혈액은 약 2리터. 심장은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컵과 저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을씨년스럽게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 비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사특한 기운이 묶인 악마의 주변으로 모이는 것처럼… 이윽고 악마의 눈이 붉은 빛으로 형형하게 빛난다)

“혈액이 뽑힌 심장은 하얀 색이다. 이대로 개복한 가슴을 닫고 나간다 해도 혈액 부족으로 트루스 로 상사는 쓰러질 것이다. 상사님, 방법을…….”

글로나스의 시선을 느낀 트루스는 손을 뻗었다. 단검 옆의 주사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혈해. 딱 500ML만. 나는 심장을 적출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되는 이유.”

“무슨…….”

“난 네 혈액을 수혈받을 수 있지만 너는 내 혈액을 수혈받지 못하니까.”

글로나스는 트루스를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시선은 닿지 않는다. 간신히 다잡고 있던 정신을 트루스가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의도한 걸까. 진짜 기절해버린 걸까. 글로나스는 하릴없이 답답해질 뿐. 

누군가가 피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컵의 피가 줄어들면, 악마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진다. 철컹거리던 쇠사슬을 하나씩 끊고, 날개를 넓게 펼친 채, 그는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다. 곧 악마가 저택을 떠난다. 주술이 거둬질 것이다. 글로나스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미친 짓에 동조하느냐, 마느냐. 기괴한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로비를 울린다. 마치 미친 사람이 깔깔대는 것처럼. 혹은 드디어 갈망하던 것을 얻어낸 사람처럼. 악마는 종용한다. ‘어서…….’ 어쩌면 이건 전부 다 환상이고, 사실은 그저 돌계단에 머리를 부딪혀 잠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글로나스는, 확실하게 들었다고 생각한다. 차갑고 다정한 속삭임을. 

‘어서 창백한 그 심장을 네 피로 적셔…….’ 

 

 

 

“넘버링 AWE-16: <저택>에 파견된 요원 A, B는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넘버링 AWE-16: <저택>은 두 사람의 방문 이후 자취를 감췄고요. 시간을 두고 요원을 파견해 관찰했지만, 기이한 현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원의 증언에 의거해 ‘악마’로 추정되는 변성 세계 사건(혹은 생물, 물체…)에 대해 추적했지만, 현재로선 성과가 없습니다. 추후 본사는 해당 저택을 완전히 밀어버릴 계획입니다. 부지의 소유권은 미 정부에게 넘어갑니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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