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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쌓인 건물 특유의 존재감이 있다. 거대한 저택은 꼭 숲속에 홀로 살아있는 것만 같다. 두 명의 경찰은 현장에 바로 진입하지 않고 마당 앞에 잠깐 멈춰 서 건물을 한눈에 담았다. 수사를 위해 찾은 현장은 오랜 시간 방치되어서인지 고풍스러움보단 원인 모를 으스스함을 풍겼다.

살인사건. 피해자는 정확히 판별되지 않았으나 최소 네 명 이상. 유력 용의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행방불명. 규모가 크고 금방 끝나지 않을 게 뻔한 골칫덩이를 그 누가 떠안고 싶겠는가. 검경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졸지에 미아가 된 사건은 알맞은 목줄을 찾지 못해 한참을 돌고 돌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담당 수사관에 권준, 낙찰. 어려움을 고난이 아닌 목적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니 적확한 배치이기는 했다. 그는 늘 남들이 피하고자 하는 사건에 알아서 몸을 들이받았으니까. 악에 받친 범인을 잡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희열을 느끼는 인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프로파일러로서 동일 사건에 배속된 고상화 역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 두 사람이 자주 손발을 맞추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완연한 가을. 겨울을 앞둔 세상은 물기를 잃어 버석였다. 두 사람이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과실수에서 떨어져나온 낙엽들이 짓밟혀 파삭파삭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

 

문고리가 돌아가고 현관문이 열렸다.

맞이하는 이가 없으니 발을 들이는 이들 역시 부러 인사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입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하고 허가받은 방문이라기에는 신을 신은 발들이 투박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안을 헤집을 것 같던 기세의 두 사람도 현관을 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홀 안쪽을 확인한 준이 동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깐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상화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홀 중앙, 과시적으로 보이는 거대한 초상화가 위압감을 내뿜으며 매달려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박제되어 생기 없는 표정으로 방문자들을 깔아보는 그림 속의 인물은 상화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다. 어째서 손님의 얼굴이 홀에 걸려 있는가?

“이 집의 주인이야.”

준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 상화가 대답했다. 목소리에도, 석고처럼 굳은 흰 낯에도 놀라움은 없었다. 기묘한 대치가 꿈속의 일인 양 상화가 먼저 고개를 내렸다. 그가 움직일 것을 확인한 준이 먼저 걸음을 뗐다. 눈이 좋은 준은 늘 이런 식으로 남의 움직임을 가로채곤 했다.

“계단이 양쪽으로 갈라지니 찢어져서 살피는 게 좋겠다.”

“처음이니 간단하게만 보고 특이점이 있으면 부르는 걸로 하지.”

“그래.”

두 쌍의 다리가 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키는 고만고만한 편이라지만 미세하게라도 체격이 다르고 보폭의 차이가 있으면 걸음은 조금씩 어긋나기 마련인데, 계단을 오를 때만은 같은 움직임을 하게 된다. 이 집은 그것을 의도한 것처럼 조형되어 있다. 쌍둥이처럼 닮은 양방향으로, 이 집에 들어온 사람들 역시 결벽적으로 행동을 함께하도록 만들어졌다고. 다를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같은 틀 안에 욱여넣고자 하는 경직된 강박이 느껴지는 공간. 거울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주인의 초상뿐이다.

한 칸씩, 꼭 하나같은 발소리가 넓은 홀에 메아리쳤다. 산 사람이 생활하지 않은 지 꽤 됐고, 있던 물건도 어느 정도 치워진 집은 텅 비어 있어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집안을 탐색하는 동안에도 목소리를 높이면 서로에게 충분히 닿을 정도였다. 의사소통에 편리하니 잘된 일이다. 이런 것에 으스스함을 느낄 인사들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감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일 년에도 몇 번씩 현장을 오가게 되는 강력계 형사에게 오싹함은 사치나 불필요한 악세사리 같은 거라지만.

계단을 오르고, 그들은 벽에 붙은 복도를 따라 문을 하나씩 열기로 했다. 두 사람은 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섰다가 뒤돌아 첫 번째 문을 열었다.

“정면에 동물 박제가 있다.”

“여기도 그래. 사슴.”

“사슴의… 머리.”

“일부러 똑같은 걸 가져다 둔 건가? 웩. 취미 하곤.”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사슴뿔에 엉겨 있다.

“박제에 피가 묻어 있어.”

상화가 타인의 발자국을 더듬듯 흔적을 찾아 방을 빙 돌았다.

“뭐? 보자… 여기도 그래.”

준이 사진기로 그것을 찍었다. 팡, 플래시는 찰나처럼 방을 가득 채우고 사라졌다.

돌아 나와 옆으로 세 걸음. 두 번째 문이다. 상화의 왼손과 준의 오른손이 문고리를 돌렸다.

“…….”

“으. 거기도 거울?”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

“무슨 방에 거울이 이렇게 많지? 여긴 어느 방을 들어가든 인테리어가 기분 나쁘네.”

방 중앙, 한 가운데 서면 십수 개의 거울에 같은 사람이 비쳤다. 얼굴, 얼굴, 얼굴…. 종종 금이 간 면에 얼굴이 비치면 스스로가 몇 조각으로든 나뉘어 보였다. 사람의 물리적 다면. 쪼개진 눈, 코, 입이 사방에서 비췄다 흐려졌다. 1초에도 서너 번씩 눈이 마주쳤다. 어디를 보나 한 사람.

꼭 같던 박자가 일그러졌다. 금이 간 거울의 위치를 체크한 준이 먼저 나오고, 상화는 한 박자 느리게 돌아 나와 문을 닫았다. 홀을 사이에 두어서일까. 이번에 상화는 굳이 바라보고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다음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발소리는 점차 박자를 다르게 해 어지러이 섞였다. 그들은 더 이상 거울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긴 서재인가?” 타박, “재밌는 책이라도 있어?” 끼익. “제목만 봐도 뭐라는지 모르겠는데.” 타박, 타박, “네 취향의 책도 있을 거다.” 탁, “책이 내 취향일 리가 없잖아?” 타박, “…….” 쿵, “여긴 침실.” 저벅, 저벅, “집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나?” ……. “무슨 건물이 이렇게 복잡하지?” “응접실이다.” “대칭이라 단순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야.”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이군.” “눈에 띄는 거라도 있나.” “평범하게 중구난방 죄다 모아둔 느낌인데. 죄다 화려해서 오히려 눈이 안 가.” “그런가.” “나였다면 좀 더 다르게 꾸몄을 텐데.” “그래도 가장 중요한 물품은 따로 모아두니 괜찮아.” “중요한 거라고?” “아.” “그보다 너 아까부터 이상하게 말한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방금…….” “…이상한 소릴 했던가?” “이 복도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않았어도, 네 정강이가 까였을 거다.” “한 대쯤 맞아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여긴 너무.” “너무?” “흔적이 많아.” “무슨 흔적?” “이곳에 살던 사람의.” “김빠지게 당연한 소리군.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유일하고 유력한 용의자잖아.” “그간 아주 애지중지 가꿨다.” “무엇을?” “수집품을…….” “야.”

복도 끝에 다다른 준이 훽 고개를 틀어 건너 맞은편에 있을 상화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방 안쪽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보는지, 그 끝을 확인할 수가 없어 자연히 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뒷모습은 익히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에, 기세에, 어조에 무언가 섞여들고 있음을 알았다. 서 있는 자세부터가 다르구만.

고민하지 않고 가장 빠르게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매처럼 날선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홀 중앙 상단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음을 떠올린 준이 지체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방도 다 살핀 것 같으니까. 저쪽 다리에서 보자.”

뻥 뚫린 홀은 규모가 커 두터운 기둥이 몇 개씩 뻗어 천장을 지탱하고 있다. 준이 이동하는 동안 기둥이 하나, 둘, 셋... 그의 옆으로 뻗은 시야를 가렸다. 세 번째 기둥을 지나친 순간 준은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복도가 비었음을 인지했다. 쯧, 잇새로 혀 차는 소리를 낸 준이 애초 합류 지점이었던 다리의 중앙을 지나쳐 상화가 있던 자리로 향했다. 장애물 없이 쭉 뻗은 복도는 텅 비어있다. 모든 문은 닫혔고. 준은 여기서 상화의 판단을 가늠하기로 했다. 평상시의 그, 평상시가 아닐 그에 대해서. 타인의 마음을 추론하고 짐작하는 건 본디 상화의 역할이었는데, 그는 자리를 내팽개치고 사라졌으니 어쩔 수 없이 준의 몫이 되고 말았다. 결론은 빠르다. 해야 할 일도 정해졌다.

고상화가 권준을 피해 도망쳤다. 초상 속의 망령을 뒤집어쓴 채로. 그러니 권준은 늘 하던대로 범인을 쫓기로 했다.

 

두 번째 문을 지나선가. 준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촛대를 발견했다. 양 복도가 완전히 같게 만들어졌음을 이미 확인한 시점에서는 놓칠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쇠로 된 촛대를 잡아 비틀었다. 그런, 시정잡배 같은 움직임이라니. 세심하게 양각된 넝쿨 문양에 입이 달려 있었다면 분명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저택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방과 방 사이의 틈 하나 없던 벽이 세로로 갈라지며 입을 쩍 벌리는 동안에도. 건물 전체가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소름끼치는 고요함이었다. 이러니 고상화가 사라지는 동안 눈치를 못 챘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너비의 길이 생겼다. 준이 서 있는 곳은 아주 밝고 환한데도, 바깥의 빛을 모조리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운 어둠이 통로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복도에 늘어진 초 하나를 잡아채 끌어왔다. 이 집은 방치된 지 오래니 당연하게도 두텁게 쌓인 먼지를 매캐하게 태워 지우고 나서야 제대로 불이 옮겨붙었다. 준이 초를 든 손을 통로 속으로 쑥 집어넣어 가볍게 흔들었다. 연약한 촛불은 많은 곳을 비추지 못했다. 고작해야 당장 코앞만 분별할 수 있게 하는 정도. 그러나 목표의 행적이 명확한 이때,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시각보다는 나머지 감각에 의지해 발을 내디뎠다.

몸이 그림자에 완전히 잡아먹히자마자 등 뒤에서 쿵, 소리가 멀게 들렸다. 문이 닫힌 모양이다. 어둠은 시야만을 제한함을 아는데도 유달리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감각이 꼬이는 기분. 희미하게 빛을 내는 듯한 푸른 시선이 분간되지 않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걷고, 걷고, 걷고...... 지형지물의 배치를 알 수 없으니 진행이 더뎠다.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그저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속절없이 흐른 시간이 짧든, 길든 간에 이 저택에 이렇게나 길게 움직일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남아있을 리 없는데. 껄쩍지근한 의심을 단언하기에는 이 길이 일직선인지, 구부러져 있는지, 평평한지, 오르막이거나 내리막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치지 않는다. 오래도록 목표를 쫓는 인내심은 준의 가장 큰 무기였으니.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일을 어렵게 만드는 파트너에게 짜증이 나기는 했다. 중간에 달려가 정강이를 걷어차줘야 했는데. 생각하던 쯤. 불빛이 희미해져 어둠과 맞닿는 부분에 하얀 손등이 스쳤다. 오른손등의 점 하나. 언제 이렇게 다가온 거지?

“준아.”

“.......”

“권준.”

“고상화. 너야?”

“그래. 너와 나 말고 누가 있겠어. 이 저택에.”

하얀 손이 준에게로 뻗어왔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해서, 맞잡자고 권유하듯이. 상화가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여기선 길을 잃기 쉽다. 나가는 길까지 안내할게.”

익숙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주제에 그는 당연하게 이 집의 주인처럼 굴었다. 상화 역시 이 곳에 온 것은 처음일진데.

“그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봐.”

“나가는 건 너뿐이야. 나는 이 저택에 두고 나가줬으면 해.”

“왜?”

“이 저택을 사랑하니까. 이 장소엔 지난 손님들도 모두 있어. 곁에서 쉬고 싶다. 그런데 너는 내보내려고.”

한기 아래에 숨겨진 푸른 불꽃 같은 열기. 채 숨길 수 없이 들뜨고 애달픈 어조. 이 저택의 망령은 사람을 잡아둔 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집이 잡아먹은 사람들의 곁에 함께 묻히겠노라 말하는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영 가늠할 수가 없다.

“나는 왜 내보낼 생각이 들었는데?”

“이길 수 없을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거래를 제안하는 거다.”

평온하게만 느껴지는 걸음은 조금 느린 박자로, 보지 않고도 어둠 속을 다 꿰뚫는지 거침없이 걷기만 했다. 나갈 길을 안다는 그 장담이 당연한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끔.

준이 맞잡은 손을 틀어쥐었다. 분명하게 통증을 느낄 정도였으나 상대에게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웃기지 마. 사람 무서운 줄 알면 이미 들여놨을 때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도 예상했어야지.”

“고집불통이군.......”

“고집불통인 쪽은 너야.”

사람은 둘이지만 들리는 발소리는 하나. 준은 걸음마다 바닥을 힘주어 밟았다. 무도한 움직임이다. 그는 집주인의 손에 모든 것을 내맡긴 주제에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굴었으며 잡히지 않은 쪽의 불빛으로는 주변을 비춰보려는 듯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빛에 걸리는 실루엣은 각지거나 둥글어 통일감이 없었다. 자세히 볼라치면 앞서가는 손이 강하게 그를 당기는 탓에 느긋하게 서성이며 수집품을 살필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죽은 이들 역시 보관되어 있다는 의미일 텐데. 준은 손을 뿌리치는 대신 숨을 죽이고 기다리기를 택했다. 성급하게 굴었다 사냥감을 놓치는 일은 즐겁지 않으니.

“왜 이 저택을 사랑한다는 건데?”

“내 손으로 하나하나 가꿨으니까. 장식과 수집품들, 거울과 박제.”

“정신 차려. 네 손은 총도 제대로 못 쏘는 경찰 거다.”

“하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알 수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이것들을 모았는지. 준아. 들어 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혀가 길지?”

“나는 이 저택을 사랑하는 만큼 이 곳에 드는 모든 손님을 사랑했다.”

“죄다 죽여놓고.”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죽였다고 생각하지 마. 영원히 이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른 거야. 나는 여기서 잠들겠지. 그러면 내가 바라는 모든 게 완성 돼.”

“.......”

“이 집은 이미 완벽하다. 더 이상의 수집품은 필요 없어. 게다가 너는...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운 침입자고. 그러니까, 자.”

서늘한 손이 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냈다. 손들이 떨어졌다. 그림자 속에 숨어든 상화는 소리로만 그 기척을 알게 했다. 그가 벽을 퉁, 하고 두드렸다.

“문은 코앞에 있어. 열어줄 테니, 너는 그냥 나가서 뒤돌아 보지 않고 떠나기만 하면 돼.”

그 말이 사실인지 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훅, 촛불을 불어 껐다. 자그만 빛이었어도 제법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적응조차 되지 않는 어둠에 눈이 잠겼다. 감고 뜨는 풍경에 차이가 없다. 준은 여전히 숨을 멈추고 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가는 문은 소리도 없이 고요 속에서 공간이 벌어지듯 나타났다. 빛은 여전히 많은 범위를 침범할 수는 없었으나 준이 문 앞에 선 남자의 실루엣을 확인할 정도는 됐다. 빛이 비쳐 드는 왼뺨에 희미하게 보이는 점.

그가 비켜서기에, 준은 문지기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섰다. 빛이 베일처럼 쏟아져 동공이 바쁘게 조여들었다. 익숙해지도록 눈을 몇 번 깜빡인 준이 금 너머로 발을 내딛다가.......

“윽.”

지금껏 쥐고 있었던 초를 내던지고 이제는 잘만 보이는 상화의 팔을 잡아챘다. 신체가 회전하는 탄력과 관성을 따라 당겨진 몸이 빛 아래로 끌려 나왔다. 유령이 아닌 사람의 몸은 빛에 타오르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두 사람분의 몸이 낙엽 위로 나뒹굴었다. 오전 나절 동안 따끈하게 데워진 바닥이 몸을 덥혔다. 던전을 빠져나온 두 사람에게는 팡파레도 게임 클리어 음악도 울리지 않았으나, 대신이라고 하기도 뭐하도록 움직일 때마다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둘 중 누구도 뺨에 붙은 갈색 잎을 떼어낼 생각을 못했다.

빛과 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생의 증거.

죽은 자는 영원히 빌어도 가지지 못할 것을 얌전히 반납한다는 멍청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빠져나갈 생각도 못하는 둔한 몸 위로 체중을 실어 누른 준이 아래에 깔린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감시당하는 주제에 어딜 빠져나가려고.”

“권준...... 무겁다.”

“정신은 좀 드냐?”

“아직 멍한데.”

“그럼 조금 더 이러고 있지 뭐.”

“무겁다고 하는 말은 어디로 들었어.”

“까칠한 거 보면 이 자식 아직 정신이 덜 들었구만.”

오래 묵은 금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저승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오랜 길을 걸은 음악가는 마지막 순간 뒤돌아보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빛을 눈앞에 두었던 영혼은 영원히 저승에 속박된 존재가 되었다. 이번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돌아보는 것은 금기가 아니었고, 눈이 마주치고 손이 닿은 순간 죽은 것은 제 자리로 쫓겨났으며, 그저 산 것이 산 자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다. 집은 이곳이 아니고 영원히 머물 곳은 먼 길에 있다. 준은 침입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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