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택의 그림자는 호수에 비치지 않았다. 그림자마저 비칠 수 없는 어두운 밤이라서, 저택의 손님들이 곧잘 서는 호수 가장자리에서는 비치지 않는 위치라서, 그 외에도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도둑맞은 그림자를 그의 부덕한 행실 때문이라며 비난하는 이들은 현실에 분명히 실존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길거리 출신의 후계자, 누구와 붙어먹었을지 모를 남루한 태생, 병약한 대신 정통성을 쥐고 있던 형제가 죽기까지 했는데 품에는 메이드 출신 애첩을 끼고 지내는 몰골이 남 보기엔 대단한 파락호였다.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무게에 짓눌리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으나, 그가 저택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저택에 기거했던 사람들은 달랐다. 이유를 찾는 사람들은 쉽게 비난을 따라 무게를 전가했고,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저택을 떠났다. 전 백작 부부를 모시던 집사와 그들의 도련님을 애지중지 키우던 유모는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생존 외의 무엇 하나 욕망한 적 없었던 사생아는 그렇게 전통도 명예도 미덕도 없는 텅 빈 권력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가진 것은 그를 죽이러 온 아름다운 암살자 하나뿐이었다. 이제 와서 진짜 도련님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든지, 적당히 방패막이 역할만 잘하다 저택을 뜨고 싶었다든지, 돌아갈 곳은 없지만 적어도 바깥이 살기에 나았다든지, 따위의 변명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이미 진짜 후계자는 죽었고, 그는 당장 이주 전의 일요일까지 장례식을 치르느라 바빴으며 유산의 계승도 거진 마무리된 상태였다. 큰 문제가 없다면 만성절이 지난 다음 날, 작위 또한 순조롭게 그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이 모든 것이 6피트 아래에서는 도무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니, 살아있는 자로서는 함구할 수밖에.
신발 굽 아래 밟히는 복도의 카펫은 먼지를 제때 털지 않은 까닭인지 어둠 속에서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걷다 보면 언뜻 금이 가거나 혹은 아예 깨져나가 커튼 자락을 부풀리는 바람의 원흉이 되는 창문들이 보였다. 저택을 방문한 이름 모를 암살자들의 짓이었다. 수지타산 맞지 않는 의뢰라도, 몸값이 부풀었다면 해볼 만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혹은 정치적 자산이 전혀 없을 때에 빨리 끝장내자고 생각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대단히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애초에 가진 것을 양보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목숨은 데릭이, 새 디에즈 백작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판돈이었고, 그 판돈이 있는 한 남자는 도박에서 진 적이 없었다. 패배자들은 이름이 없어 무덤을 가질 기회도 얻지 못했다. 이 저택에 이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 두 사람이다.
남자는 방문 두 개 정도를 지나친 후에야 복도의 커튼 너머 서 있는 리안테를 발견했다. 특별히 발코니에 무언가 볼 만한 것이 있어서 아니란 것 정도는 데릭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저택에 온 후 줄곧 먼 곳을 보는 중이었다. 떠나야 한다는 확신을 언제쯤 내려둘지는 알 수 없다. 죽이지도 못할 텐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칠 수 없을 텐데, 영영 실패할 텐데도. 커튼 너머의 푸른 그림자는 줄곧 그를 외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가냘픈 체구를 감싼 검은 드레스의 소매가 바람에 흔들렸다. 남자는 커튼에 흰 손 끝이 닿을 때가 되어서야 그것이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때 저택의 안주인이 공들여 골랐을 레이스 커튼은 은사를 섞어 짠 듯 희미하게 빛나고, 그 너머로 푸른 눈이 그를 보고 있다. 눈이 깜박, 하고 감겼다 뜨이는 순간에야 비로소 상대가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창백한 손 끝이 커튼에 휘감겨,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이쪽으로 향했다. 남자는 아무 문제없다는 듯 그대로 그 손을 잡아 이 쪽으로 당겼다. 드레스는 등이 드러난 까닭인지 몸이 전반적으로 찼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딱히, 아무것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
“가엾게 여기진 않아.”
완전한 부정은 아니었다. 약간의 온기를 나눠 받은 후 리안테는 그를 뿌리치듯 하고 옳게 섰다. 그러나 남자가 허리에 자연스레 팔을 뻗고, 느린 걸음으로 이끌면 바스락, 하는 치마 움직이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데릭은 이미 그가 언젠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자신의 곁에 설 것을 가늠하고 있었지만, 정체성이 다소 많은 상대는 그렇기 때문에 영영 그 옆에 서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서로 다른 방향의 생각이 이어졌다. 걸음은 한 방향이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저택을 능숙하게 둘러보고 나면 관리라곤 하나도 되지 않은 1층의 메인 홀에 들어섰다. 홀 한가운데에는 박살 난 샹들리에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근처의 크리스탈 파편들은 꼭 그 달빛의 파편처럼도 보였지만, 가까이 가면 굽 아래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빛을 잃었다.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저택은 짧은 시간 동안 엉망이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요를 찾았다.
“적어도 여긴 꽤 예뻤는데. 아쉽게 됐다.”
“누굴 쫓아다니느라 난 볼 일도 없었어.”
“뭐, 그날 이후론 파티 같은 걸 열 여유도 없었고 말이지….”
데릭은 그날의 풍경을 기억한다. 오랜 시간 바깥을 떠돌던 도련님의 귀가를 축하하며 디에즈 백작은 파티를 열었다. 사생아 도련님에겐 호화스러운 파티였지만, 방패막이를 뽐내기 위해서라면 적절한 조치였다. 불편한 정복과 빛나는 샹들리에, 언뜻 스치는 시선은 고깃덩이를 품평하는 듯했다. 썩 기분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커다란 샹들리에만은 확실히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다. 태양도 달도 아니고, 고르자면 별을 모아둔 것 같은 그 샹들리에다. 그것이 이제는 발이 닿는 위치에서, 파편들은 발아래 짓밟히고 있다니 우스웠다. 다시 새것을 맞춰야 할까? 그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을 자리를, 누군가 그의 목숨을 단단히 끝장내려고 공들여 샹들리에를 고정한 밧줄에 흠집을 냈을 나날을.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짓을 해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다시 달아야겠다.”
“또 떨어뜨릴지도 모르는데.”
“너한테도 보여줘야지. 예뻤다니까?”
리안테는 그 말에 잠시 조용해졌다. 찰나, 데릭은 팔 안의 리안테를 휙 당겨 그의 다른 손을 잡았다. 가까이서 마주 본 눈은 대단히 신비로운 빛을 하고 있다. 전 백작 부인이 여보란 듯 뽐내던 그 목걸이의 토파즈보다 이쪽의 눈이 더 좋았다. 리안테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데릭이 선수를 쳤다.
“춤이라도 출까.”
“만성절 전야에 무슨 악취미야….”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잖아. 분명히 확인했어.”
관에는 단단히 못질했고, 무덤의 흙은 분명히 제대로 덮였다. 날이 좋아 금방 썩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이 주 전의 일이다. 남자는 저택에 오기 전부터도 이미 여러 사람을 시체로 만든 전적이 있었고, 저택에 들어온 후로는 방패막이의 소임에 충실하게 살았다. 시체는 움직이지도 살아나지도 않는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면 그는 진작 어머니의 얼굴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오직 확신할 뿐.
깨진 유리 파편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창 밖으로는 관리되지 않은 나무의 그림자가 제각기 손을 뻗어온다. 오케스트라 대신 펄럭이는 커튼 너머 바람 소리만이 날카롭다. 돌아올 것인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다면 덜 썩어 문드러진 순서대로, 제대로 파묻힌 적 없는 순서대로 돌아올 것이다. 무덤을 갖지 못한 것만이, 제대로 잠들지 못한 것만이, 눈 감는 법을 알지 못한 것만이.
과연 판돈을 잃고 텅 빈 시체들에게도 여전히 사명이 있을 것인가? 만일 그들에게 아직 목적이 있다면, 길거리 출신의 백작을 죽여야만 하는 의무가 남아 있다면, 임무를 마치지 못한 동료를 처단해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좋다. 바로 여기에서.
살인자와 그가 고른 안주인이 돌아오는 이들을 마중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