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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수성

 

아담 가르시아의 저택은 할로우 골짜기에 있었다. 한여름에도 제대로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골짜기는 축축한 안개와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나무 표지판,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따위로 방문객을 환영했다. 가르시아 저택의 대부분은 축축 늘어지는 생기 없는 담쟁이덩굴로 감싸여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 최초의 남자가 기거할 만한 곳이었다.

오래된 명예와 신선한 자본이 교차하는 시대에 브라이언 골든구스는 굳이 품을 들여 시간이 멈춘 듯한 저택에 방문했다. 별 볼 일 없는 남작 작위와 얼마 안 되는 자금, 형편없는 토지라지만 브라이언이 이제부터 추진할 사업에는 유용한 보탬이 될 것이다. 설령 아담이 거절하더라도 브라이언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간절한’ 귀족들은 많았으니 문제는 없었다.

“…….”

의외로 문을 연 것은 사용인도, 저택의 주인도 아닌 여자였다. 사교계에서 묻히다시피 한 가르시아가(家)의 사정을 브라이언이 알 리 없다. 수수하고 낡은, 꼭 유령 같은 흰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를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검은빛의 머리카락도 짙은 살갗도 아니었다. 뾰족한 눈매 아래의 눈동자. 그 눈 색과 닮은 것을 어디서 보았는데, 브라이언은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빗나갔다.

“여보, 골든구스 씨가 오셨어요.”

“드디어!” 과장된 밝은 목소리가 덤벼들었다.

안주인을 밀치다시피 하며 사이에 끼어든 아담은 아내와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었다. 구불거리는 밀짚의 머리카락과 그보다 옅은 두 눈. 동그란 눈동자를 반달로 접어 웃는 얼굴이 결혼 전에는 꽤 인기가 좋았을 성싶었다. 그러나 누렇게 뜬 안색과 눈 아래의 거무스름한 흔적, 악수를 하는 중에도 잘게 떨리는 손을 보아 할로우 골짜기의 망령이 단단히 깃든 모양이었다.

지병이라도 있는 건가. 하긴, 이런 데서 사는데 건강하다는 게 이상하지. 브라이언은 그쯤 생각을 정리했다.

“오는 길이 괜찮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골든구스 씨. 얼마 전 내린 비로 큰 전나무가 쓰러졌거든요.”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풍광에 한껏 취했더니 어느덧 가르시아 저택이더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담은 크게 만족했고, 아내인 릴리스를 브라이언에게 소개해 주었다. 릴리스 가르시아. 한 다발의 백합이 되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눈빛을 가진, 하와도 이브도 없는 깊은 밤의 정찬이 시작되었다.

브라이언이 가져온 고급 포도주는 아담의 허영심에 딱 맞았다. 술의 반이 비었을 즈음에 아담은 흔쾌히 브라이언의 사업에 동참하기를 선언했다. 차린 건 없으나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 음식을 먹으며 브라이언은 릴리스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은 채 제 몫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소스가 부족하거나, 치즈가 떨어졌을 때만 그림자처럼 주방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군요. 가르시아 씨.”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앎에도, 브라이언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은 코웃음을 쳤다. 볼품없는 콧수염에 치즈 가루가 묻어 있었다.

“웬걸, 얼마나 드센데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콧대만 높습니다. 골든구스 씨, 내 인생의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하지요. 결혼은 인생의 무덤입니다. 잘난 사내들이 어리석은 서약 탓에 어떻게 파멸하는지!”

브라이언은 동조와 반발 사이, 애매한 추임새를 흘렸다. 취기가 거나하게 올랐는지 아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추한 꼴을 보기가 싫어 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잔에 작은 얼굴이 반사되었다.

주방에서 릴리스 가르시아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물이 그대로 비치는 투명한 백색 눈동자. 목에 걸린 작은 금색 로켓을 만지작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손을 내린다. 아담과의 결혼사진이 들어 있을까. 경멸해 마땅한 남편이라 해도 항시 간직하는 걸까. 상기된 뺨의 젊은 청년을 잊지 못하기라도 하나.

결혼이란, 브라이언은 포도주를 삼켰다.

정말이지 인생의 무덤이군.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서우인, 아담 가르시아는 흐름을 거슬러 무덤으로 들어갔다. 릴리스의 서신은 부군을 잃은 미망인의 도리를 충분히 다하고 있었으나 정갈한 내용 속에서도 날카롭게 삐친 필체가 도드라졌다.

‘생전 남편은 골든구스 씨의 사업에 큰 기대를 하였으나 저는 지식이 일천하여, 더구나 갑작스레 남편을 잃어 경황이 없습니다. 투자를 철회함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라, 별도의 조문은 받지 않는 점 모쪼록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라이언은 릴리스의 서명을 손톱 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아직도 금색 로켓을 목에 걸고 있을까. 초대받지 않은 집에 발을 들이기로 결심한 것은, 릴리스의 서명에서 희미한 불온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릴리스 크로웰.

“가르시아 부인.”

검은 망사 베일 아래의 눈빛은 여전했다. 사전 합의되지 않은 방문임에도 릴리스는 동요하지 않고 브라이언을 맞았다. 6피트 아래 묻힌 아담이 들었다면 크게 노했겠으나, 처음 보았을 때의 순백의 옷보다는 칠흑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 어딘가 고혹적인 드레스가 릴리스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크라우벨로 괜찮아요. 이제는 처녀적 성을 써야죠.”

“크로웰이 아니라…….”

“부친께서 영국 출신이 아니어서요.”

장례식은 오전에 끝났으나 먼 길을 오시느라 피로하셨겠다며, 릴리스는 흔쾌히 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남편이 없는 저택에서 하룻밤이라니 세간의 상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나 브라이언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온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얇은 슬립을 입은 릴리스 크라우벨이 손님 방의 문을 두드렸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침실 구석에서, 아담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요.” 릴리스는 문간에 선 채 나직이 속삭였다. 밤의 미혹이 움푹 들어간 아이홀에 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조각 같은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에게 사탕을 좀 쥐여 주지 그래요.”

그러면 돌아갈 텐데. 릴리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빗장뼈를 간질이며 흘러내린다.

“애석하게도 가진 게 없어서요. ……도와주시겠어요?”

“그럼요.” 브라이언이 한 걸음 물러섰다. “여기라면 안전할 테죠.”

이윽고 문이 굳게 닫혔다.

 

손가락 아래 뭉개지는 거위 털 이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브라이언은 겨울의 아지랑이처럼 몸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목덜미에 스치는 서늘한 공기가 간지러워 소름이 돋았다.

“릴리스, 릴리…….”

한밤의 정인을 찾아 속삭이는 목소리가 의미 없이 흩어진다. 그는 깨어나는 동시에 옆자리의 숙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닫히지 않고 남겨진 마호가니 문의 틈으로 달빛이 찾아들어 길게 늘어진다. 브라이언은 황금의 그림자를 닮은 그 꼬리가 꼭 뒤를 따라오라 유혹적으로 흔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홀린 듯 방을 나섰다.

한때는 정교한 문양이 그려진 도자기와 바다를 건너와 이국의 정서를 함빡 머금은 대리석 조각이 장식했을 복도는, 가세가 기울며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영세한 귀족의 결말이 대부분 비슷한 형태를 띠듯 가르시아 남작가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경매에 나오는 귀한 골동품들을 보고 꿀을 발견한 벌떼처럼 달려드는 이들은 골든구스와 같은 신흥 장사꾼들이었을 테고. 대대로 내려오는 낡은 족보 대신 쉽게 얻을 수 없는 상징으로 가계를 치장하고자 하는 까마귀들. 아직은 고귀한 혈통의 정서가 힘겹게나마 버티고 있는 시대였다.

실내화의 밑창이 바닥에 닿아 작은 소음을 낸다. 브라이언은 손등으로 창가의 붉은 벨벳 커튼을 걷는다. 달밤 아래 녹아들어 희고 검게 부유하는 유령 같은 여자가 우아하게 정원을 거닐었다. 가느다란 다리를 뻗을 때마다 속이 비치는 네글리제의 긴 자락이 한 박자 늦게 휘감긴다. 소리도 흔적도 없는 맨발바닥이 말라비틀어진 잔디를 디뎠다. 릴리스는 꼿꼿하게 편 허리를 한시도 굽히지 않은 채 목적지가 정해진 것마냥 길을 걸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듯 자유로우면서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릴리스의 자태에 빠져들었다. 시선을 떼지 못한다. 저편에 떨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희미한 숨소리도 나지 않게 고요히 호흡한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나부낀다. 망설임 없이 나아가던 발은 연못 앞에 멈춰선다. 뛰어들기라도 할 셈인가? 장례식날 몸이 더럽혀진 정숙한 미망인처럼? 선이 뚜렷한 콧날에 미세하게 금이 간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그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퐁.

파동이 그리는 원은 고작 한 번, 젊은 남자의 주름보다도 연한 줄기는 바람이 만드는 잔물결에 금세 흐려진다.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넣은 릴리스는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오래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짧고, 금방이라 말하기엔 긴 시간을.

 

해가 떠올랐을 때 브라이언은 장미 모양으로 박힌 천장의 모자이크를 올려다보며 긴 꿈을 꾸었던 게 아닌지 의심했다. 누군가 방 안의 커튼을 걷어두고 나갔는지, 아치형 창의 유리를 통해 동이 틀 적 새벽녘의 경치가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택에 하나 남은 하녀, 혹은 릴리스가 다녀간 것이겠지. 그는 자신이 후자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광을 받은 가르시아의 안개 낀 정원은 놀랍도록 평화로워 보였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돌아보며 소양을 갖춘 정원사를 고용할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가늠한 브라이언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릴리스의 자취에 이끌렸다. 값비싼 구둣발이 잔디를 문지를 때마다 여자의 그것보다 두 마디는 큰 발자국이 남았다. 그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 연못의 수면을 내려다본다. 잠자리 날개 같은 흰 자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 참,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설령 릴리스가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뜰을 떠돈 게 사실이라 해도, 그건 아담의 부고와 어떠한 관계도 없는 일이다. 브라이언은 싸늘한 공기가 폐부에 침입하는 걸 느끼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반짝거리는 구두코에 톡 닿아 굴러가는 아주 작은 유리병이 아니었다면. 물에 젖은 병은 마치 불온한 인력에 끌려 나온 듯했다. 브라이언은 느리게 몸을 숙여 빈 병을 집어 들었다. 안에 들어있던 ‘무언가’를 상상하기도 전, 릴리스의 목에 걸린 금색 로켓을 떠올린다. 그 속에 감춘 게 결혼사진이 맞았을까? 짐작하건대 남편의 초상화였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만약, 어쩌면……,

“식사는 입에 맞으세요?”

“─훌륭합니다.”

흰 대구 살과 구운 채소를 흠 하나 없는 예절로 덜어낸 브라이언은 나이프를 쥐고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릴리스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시선을 마주한다.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신선한 요리는 첫 방문 때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이것이 가르시아가 사라진 릴리스 크라우벨의 취향일 거라 짐작했다. 곧게 뻗은 빗장뼈를 감추듯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장식 없는 검은 옷이 정숙한 여인의 표본치고는 지나치게 릴리스와 어울린다는 점도 다시금 깨닫는다. 그는 나이프에 비친 본인의 얼굴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온하다는 것을 점검하고 포도주 대신 후추의 맛이 감도는 혀를 굴렸다. 릴리스의 귀에 매달린 진주 두 알이 바다 거품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장신구라고는 그뿐.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고, 목걸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지나치게 마땅하게 느껴져 브라이언의 눈꺼풀이 떨렸다.

릴리스는 손님을 맞이한 주인처럼 적절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사자를 위한 밤은 지나갔으므로 아담의 호통은 들려오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포도주와 같은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 끝이 우스꽝스럽게 후들거리던 작태를,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던 아담의 흐리멍덩한 웃음을 생각한다. 단출한 디저트까지 남김없이 비워낸 브라이언은 포크를 내려놓고 붉은 냅킨으로 입가를 두드렸다.

“무례한 방문에도 친절히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라우벨, 양.”

그 호칭에 릴리스는 호응하듯 사뿐히 입매를 휘었다.

“개의치 마세요. 골든구스 씨.”

브라이언은 정중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그는 제게 부여된 미래를 손쉽게 그려나간다. 이대로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저택을 떠나자. 뒤돌아보지 않으면 발아래 끈적하게 달라붙은 꺼림칙한 진실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고혹적인 입술이 틈을 벌린다. 이제 막 생각난 것처럼 살며시 덧붙인다.

남자는 생각한다. 눈앞의 여자는 너무나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그리고,

“다음에 또 와주시겠어요?”

릴리스는 다음을 기약한다. 브라이언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새하얀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을 본다. 기이한 광택이 감돌면 그는 마침내 릴리스의 눈이 담고 있는 빛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성Mercury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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