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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1일, 할로윈.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 밝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떠있고, 주변이 시끄럽다는 것 정도. 지금의 하인리케 기네비어에게 있어 할로윈이란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기념일이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공포 소설 작가로서 단편집의 판매 부수가 올라가는 날 정도겠다. 

 이웃에게서 아이들을 위한 간식 준비 요청을 받은 게 벌써 일주일 전이다. 할로윈은 어린 아이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쌓기 좋은 기념일이니까,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지 않는가. 그래서 기꺼이 수락해 이것저것 사 두긴 했는데… 

“어느 바구니에 담아 두는 게 나으려나.”

집에 있던 평범한 바구니와 간식 구매 이벤트로 받은 호박 바구니ㅡ잭 오 랜턴ㅡ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맞춰주는게 좋겠다 싶어 호박 바구니에 간식을 담아 보았지만, 괜히 유난인 것 같았다. 누가 지적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사탕과 초콜릿, 여러가지 맛이 나는 젤리빈과 캬라멜. 달콤한 것들이 가득 들어간 바구니를 바깥에 내려두고 조금 질색하며 돌아왔다. 보기만 해도 너무 단 나머지 쓴 커피를 내려와 잔업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아직 밤이 찾아오기에 이른 시간이다.


*


 띠롱.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편집자의 문자다. 일전 투고했던 단편 소설이 실린 잡지가 제법 잘 팔렸다는 소식이다. 할로윈 시즌에 맞춰 쓴 글이니 당연한 결과다. 일부러 연락을 주다니, 언제나 친절하고 성격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종종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일은 잘 하니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어느덧 붉은 노을 빛이 창문을 채우고 있었다. 곧 할로윈의 밤이 시작될테니, 이제 소란을 피해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 

할로윈이라… 오늘 저녁은 단호박과 아스파라거스를 함께 구워 먹으면 좋겠는걸.

 평온한 저녁, 집 앞을 오가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여러 종류의 간식을 준비해서인지 문 앞의 인기척은 제법 오래 남아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간식을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어 제법 즐거웠다. 

완전히 해가 지고 모두가 돌아간 밤, 아이들 역시 가족들과 자신이 가져온 간식들을 자랑하기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인리케 기네비어 역시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침구를 정,

 띵동.

…리 하려고 했으나, 늦은 밤 울리는 벨소리에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 … 간식..”

 얼핏 들리는 목소리와 바깥으로 보이는 유령 분장의 실루엣, 빛이 없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뒤늦게 할로윈 간식을 받아 가려는 아이일 것이다. 현관 전구를 교체한다는 게 벌써 이렇게 돼버렸다. 사다리도 빌려야 겠는데, 이웃 집에 있으려나? 지금 남은 건 초콜릿 뿐인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걸. 그런 사사로운 생각을 하며 작은 쇼핑백에 남아 있던 초콜릿을 담아 문을 열었다.

눅눅한 습기가 코끝을 스친다. 
어라, 오늘 비가 왔던가?

 


 한편, 일상의 루틴이 연구와 자료수집 혹은 정체불명의 사건 파헤치기가 전부인 세르야 알틴과 그의 동료들은 잔뜩 긴장에 처해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 당신이 노동자라면 알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축제일 뿐인 하루가, 또 다른 이들에게는 온갖 업무가 몰려드는 지옥의 피크타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하는 일을 들여다보자. 세르야 알틴은 이론으로 설명 불가한 온갖 이상현상을 조사하는 비밀 연구소의 일원이었다. 튀르키예 국적이지만, 굳이 국가 정체성을 따지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 덕에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업무 내용 대부분이 수상한 촉수 괴물이 등장하지 않나, 노심초사하며 관측하는 게 거의 전부라는 사실일까. 하필 오늘은 죽은 자가 돌아온다는 10월 31일, 할로윈. 어디서 진짜 귀신이라도 등장하면 곤란해진다.
안전모를 둘둘 싸맨 연구원이 책상을 내리친다. 쾅, 소리와 함께 주변 시선이 그를 향한다.

 “이봐,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이상해. 곧 퇴근인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지 않아?”
“이 자식! 그런 말 하면 갑자기 호출 생기는 거 몰라? 조용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앉아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으면 된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책상을 친 연구원의 표정이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릴없이 검은 화면만 쳐다보고 있던 세르야도 덩달아 같은 궁금증이 떠올랐다.
퇴근을 앞둔 오후 8시 49분. 작년 할로윈 때는 어땠더라. 분명 묘지에서 썩다 만 시체가 일어나고, 전기톱을 든 살인마가 도시 건물을 쥐잡듯 뒤지며 이름 알파벳 순으로 살인을 저질러 난리가 났었다. 그 외에도 사사로운 사례가 자그마치 72건.
그런데 오늘은 단 하나의 연락도 들어오지 않았다.

 “앗싸, 퇴근! 저 먼저 숙소 갑니다.”
“찜찜하다고 추가 근무를 할 이유는 없지. 나도 갈게.”

 미심쩍은 표정들. 물론 몸은 솔직하다.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세르야도 그들 중 하나가 되기로 결심했다. 재미있는 일 안 일어나나. 그랬더라면 곧바로 제 자칭 친구인 하인리케 기네비어에게 연락부터 넣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올해의 할로윈은 이대로 삼삼하게 지나갈 모양이었다.
세르야는 숙소 건물을 지나쳐 제 자취방으로 향했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늦가을의 밤공기가 조금 시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소한 귀신은 나올 것 같은 날인데.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걸까?’ 생각은 어둠과 함께 우련히 묻혀갔다.

 엠보스가 다 가라앉아 이젠 딱딱하기만 한 침대.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작지만 선명한 소리. 준비한 사탕은 없었다.

 “이 주변에 아직도 장난을 치고 싶은 아이가 남아 있을 줄이야.”

 묵직한 몸을 어떻게든 일으킨 세르야가 문 앞까지 발을 내디뎠다.
아무런 일도 없는 날이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독 피곤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으나 답지않게 긴장이 풀려 있었다. 죽은 자가 정말 돌아온다고 해봤자 저를 위협할 만한 존재들은 이미 성불이나 했을 테니.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그는 저항 없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순간 짙은 습기와 물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그 즉시, 둔탁한 통증이 뒤통수를 덮쳐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어떻게든 일으킨 하인리케 기네비어는 지금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찰 지경이었다. 우선 어둠에 익숙지 않은 시야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이 죄다 낡고 더러웠다. 우뚝 솟은 사람 하나는 어정쩡한 각도로 몸이 기울어져 위태로워 보였다. 손목도 발목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입만은 열려있는 게 천만다행이다.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거구의 사내 앞으로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이고 쓸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봐요. 저기요, 세르야?"

 평소 같았으면 벌써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 정도로 너털웃음을 지었을 사내다. 물에 빠트리면 입만 동동 떠오를 놈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침묵을 유지한다는 건….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눈은 윤곽을 잡아낸다. 빛깔이 하나씩 구분되었다. 침침한 검정 사이의 미세한 붉은 빛. 서스펜스, 미스테리, 호러가 주력인 작가 특유의 풍부한 상상력이 금방 앞뒤를 연결한다. 말인즉 이 사람, 뒤통수라도 맞고 기절한 모양인데.
다행히 피는 말라 있었다. 어쨌든 이 사람을 깨워야 뭐라도 시작할 수 있어. 그렇게 떠올리며, 이를 악문 기네비어가 어깨를 세워 여러 번 부딪혔다. 툭. 툭…퍽.

 "으으……아니, 안 죽었어. 내 발로 퇴각할게. 한다니까……."

정신이 들고 한다는 소리가 어쩜 이렇게 살벌할 수 있나. 기네비어는 은근슬쩍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 그를 한 번 더 들이받았다.
 
"잠꼬대 그만하고 일어나요. 우리 지금 큰일 난 것 같거든요."
"이런…이거 내가 아는 목소리잖아. 내가 하인리케 집에서 잘 정도로 뻔뻔한 놈이 되진 않았어. 아직은."
"뭐라는 거예요. 여기 내 집 아니거든요?"

눈살을 찌푸린 하인리케를 뒤로하고, 드디어 세르야 알틴이 몸을 일으켰다. 당신 집이라기엔 너무 냄새나긴 하네, 같은 감상을 덧붙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맞은 건 잘된 일이다.
척 보기에도 수상한 공간이었고,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두 명에게 이제 이 정도는 익숙할 수준이긴 했다. 적어도 촉수 괴물이 몸을 휘감고 있거나 한쪽의 목이 풀린 나사처럼 돌아가다 떨어지진 않았으니. 하지만 익숙하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단 이것부터 풀자고."

 세르야는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설명하며(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으나)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 금방 밧줄을 풀어버렸다. 하나를 풀면 둘은 더욱 쉬웠다. 순식간에 손발이 자유가 된 세르야가 장난기를 발휘하기 전, 하인리케는 최대한 빠르게 '빨리 내 것도 풀어줘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 몸을 돌려받고 나서, 두 명은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처럼 움직였다. 우선 기네비어가 전화기를 켜 신호를 확인해봤다. 밀린 연락은 없음. 잡혀 온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반면 옆에서 세르야는 플래시를 켰다. 방 안에 존재하는 가구나 물건 따위를 훑는다. 전체적으로 때나 먼지, 정체불명의 검은 물질들이 껴 있지만, 가지런히 창쪽으로 놓인 침대나 스탠드 등, 벽에 붙은 작은 수납공간이 이곳을 객실이라 말해주는 듯했다.
연락을 금방 포기한 하인리케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늘어붙은 자국은 애써 무시하고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보내자 세르야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호수야. 거의 바로 뒤에 있어. 퇴로가 될 만한 곳이 없군.”

 하인리케는 몇 번 심호흡하며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호러 스팟처럼 기괴하게 꾸며진 것이 영 꺼림칙하다.

 "이건 또 뭐예요?"
"글쎄다. 낙서인가. 확인해봐."

 라이트를 비추자 독일어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실타래처럼 검고 두껍게 꼬인 글씨와 아이를 그린 그림이 보였다. 크레파스 따위의 두꺼운 펜으로 힘주어 그린 걸까, 한 번씩 파편이 튄 듯 이상하게 선이 끊겨 있다. 괜히 눈길을 줘버린 하인리케가 선을 눈으로 좇아가는 동안 삐걱, 삐걱. 소리가 들렸다. 위치는 문 너머.
 
“쉿!”
“…사람?”
“뭐, 내가 듣기로는 그런 듯해.”
“새삼스럽지만 당신도 정말…이런 상황에서 겁을 안 먹네요.”
“그렇게 보였어?”

 문고리를 몇 번 건드린 세르야가 몸을 숙이기에, 하인리케도 자연스럽게 제 몸을 숙이고 주변을 관찰했다. 반문한 세르야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추측하기는 어려웠지만, 마냥 여유로운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줄줄이 늘어놓았을 농담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재촉하듯 옆구리를 한 번 찌르자, 그제야 세르야가 낮은 목소리로 제 의견을 전달했다.

 “일단 나가보는 수밖에 없겠다.”
“클리셰 같군요. 범인일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데?”
“…….”

 대답 나왔네. 그렇게 말한 세르야가 망설임 없이, 그러나 소리는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혔다.
암순응이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복도로 섣불리 발을 뻗었을지도 모른다. 두 명은 동시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규칙적인 문 사이사이에 검붉은 게 잔뜩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난 발자국이 복도 전체에 찍혀 있었다. 고약하고 썩은 냄새가 나기에 하인리케는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두 명이 나온 문패는 때가 타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501호>라고 적혀 있었다. 모텔 같은 숙박
복도 끝에는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가 하나 있었다. 다 떨어져 나가는 버튼이나 검붉게 녹이 슨 내부 손잡이를 마주하니 전혀 멀쩡할 거라는 자신이 들지 않았다……. 다만 먼저 몸을 움직인 세르야가 손짓 발짓으로 알려주건대, 엘리베이터 근처에는 발자국이 거의 없다고.

 “그래서 어떡하라고요? 일단 타보기라도 하자는 거예요?”
“믿음이 안 가면 나 혼자 문이라도 닫아볼게.”

 보폭을 좁히고 양옆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걸어가는 하인리케를 뒤로하고, 세르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새까맣게 변해 층수가 보이지도 않는 버튼을 몇 번 누르자,
파지직.
위에서 전기가 튀었다. 떨어지는 불똥에 세르야가 급히 손등을 휘저었다.

 “이거 안 되겠네.”
“그냥 가요. 저쪽에…….”

 하인리케가 손짓한 쪽에는 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있었다. 너머로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에게는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예 엘리베이터가 터져버리기 전 세르야가 허겁지겁 그를 따랐다.
까만 먼지가 묻은 계단 손잡이에 닿지 않게 노력하면서, 두 명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디뎠다.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발끝을 세웠다. 작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계단 아래 공동에서, 무언가 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어…….
무거운 쇳덩이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 고막을 긁는 불쾌한 소음.
「정체불명의 범인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한낱 물건 따위가 아님은 분명했다. 애타게 부르는 소리는 마치 우리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계단 아래 틈으로 암흑을 바라보며, 언뜻 하인리케는 돌이켜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상황이 아니라…….

 “구절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여러 복도를 마주한 두 명이 느낀 것은, 이 호텔이 생각보다 오래된 공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더럽고 관리가 되지 않은 건 사실이나, 관리인이 없는 외진 곳의 건물이란 금방 더러워지고 마는 편이니까. 게다가 이 호텔의 뒤는 호수가 있어 무척 습했다. 창문을 열면 시원하지 않을까 했으나, 세르야가 지적했다. 물때가 끼기 쉬운 환경에 있다고.
그리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면, 오히려 지적하고 싶은 게 한가득이 되고 만다. 전기가 튀어 금방이라도 땅에 꺼질 듯한 엘리베이터라든지, 벽에 가득한 누군가의 낙서라든지. 일부러 위험한 괴기 장소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나.

 “말이 안 돼요. 누가 공포영화 찍고 싶어서 건물 전체를 이렇게 꾸민 게 아니라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아지는데요.”
“소설가다운 지적이군.”
“일부러 환경을 이런 느낌으로 조성하기도 쉽지 않아요. 오래되지 않았지만…그렇다고 누가 꾸며낸 느낌도 아니라고요.”

 세르야와 하인리케는 2층 복도까지 내려와 있었다. 객실 하나하나를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방은 저마다 더럽고 수상했다. 때와 얼룩이 묻은 옷가지가 잔뜩 쌓인 방도 있었다. 한편 못쓰는 휴대폰이 대거 버려진 방도 둘러봤다. 희미하지만 생활 흔적이 있다. 그것도 꽤 최근까지 남긴 것이다.
세르야가 의미 없이 흔적을 뒤지는 동안, 하인리케는 제 안의 위화감이 어디서 왔는지를 급히 찾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마주한 적 있는 심상 풍경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미간을 짚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런 상황에 부닥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경험이 아닌 이야기가 시발점일지도 모른다. 최근 어떤 소설을 썼더라? 분명 몇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 내부를 떠도는 로어 소재의 단편소설집.

 “아, 그러고 보니 그 로어 내용이…….”

 말과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세르야가 하인리케의 목덜미를 집어 당겼다. 질문할 새도 없이, 2층 복도 끝에서 바닥을 질질 끄는 소음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빛난다. 끼익. 끼익,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다. 비틀거리던 그것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람 머리보다 커다란 도끼날이었다.

 “확실히 이쪽을 노리고 있군. 도망치자!”
“무슨 소리예요? 어디로 도망치자는……. 세르야!”

 더 물어볼 틈도 없이 옷자락이 강하게 당겨졌다. 두 명의 몸이 순식간에 어둡고 좁은 방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세르야가 겨우 몸을 움직여 문을 틀어막자마자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날붙이가 머리 바로 옆을 찍은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게 보였다. 뭐하는 거야, 빨리 숨을 곳이라도 찾아봐…다급하게 움직이는 입 모양을 겨우 읽어내어, 하인리케가 급한 심정에 찾아낸 건 킹사이즈 침대의 바닥.
죽은 벌레나 토막 난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지, 따위의 느긋한 걱정을 할 시간이 없다. 하인리케는 세르야를 지나쳐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쌓인 먼지에 기침이 일었지만, 필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들어와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박차고 뛰어나온 세르야가 그 아래로 함께 몸을 던졌다. 몸 두께 때문에 한참을 꿈틀거려야 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웃을 기운조차 바닥난 듯했다.

 이내 완전히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썩은 나무로 엉망이 된 바닥을 두 발이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추격자는 침대 근처를 한참 배회하다 이내 느리게 몸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

 “…”

 하인리케는 말 대신 상대의 손바닥을 당겨, 그 위에 글씨를 써 전달하기 시작했다. 반면 거의 복화술 하듯 입을 최대한 작게 달싹이는 세르야였다.

 [아까 말하다 만 건데, 이런 내용의 로어를 알고 있어요. 남부에서 잠깐 돌았다 사라진 이야기라고 해서 잡지에 투고 요청이 온 적 있었는데,]
“지금 당신 소설이 현실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반대예요. 전 현실에 도는 괴담으로 소설을 썼어요. 그게 무슨 내용이었느냐면, 한 쌍의 연인이 오래된 호텔로 여행을 왔다는 것으로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다시 이상한 잡음이 시작되어 밀담은 급히 마무리되었다. 침대 근처의 어딘가에서 고장 난 기계 특유의 노이즈가 들려왔다. 서성이는 발목이나 눈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된 공간에 전화라도 올 일이 있나. 세르야와 하인리케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몸이 좀 더 작은 사람.
검게 물든 스웨터를 털어낼 새도 없이 손을 더듬어 객실 내부의 탁상을 짚어 보았다. 하인리케의 손에 잡히는 것은 유선 전화기였다. 곧바로 들어 올리자 인공음 사이로 조금씩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월, 저기 바깥 좀 봐. 호수가 있어.
―그러네. 자기 저런 걸 좋아했었지. 물이 꽤 깊어 보이는데?
―아직 잠은 안 와?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달라고 했었잖아, 그라함. 밖에 구경이라도 나갈까.
―그렇게 하자. 오늘은 분명 좋은 달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잡음)
―(흐느끼는 소리)
―이상하네…….
―이상해. 
―분명 물에 빠지는 걸 봤는데.

 “어째서 아직 여기에 있는 거야, 월 페터스?”

 순간, 손에 힘이 풀려 수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깥을 배회하던 발소리가 멈췄다.

 “기네비어, 그거 전화선이 끊겨 있는데.”
“잠깐,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 알아냈어요. 급하니까 빨리 설명할게요.”
“뭔데 그래?”
“죽은 연인이라고 말해요. 내 생각이 맞았다면, 저 미친놈도 조금은 머리를 굴리느라 시간을 낭비하겠죠!”
“잘 모르겠는데,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는 없어?”
“지금은 안 돼요!”

 세르야가 할 수 있는 건, 어쨌든 함께 납치된 동료의 말을 믿는 것뿐이다.
어떻게든 좁은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간 세르야가, 부서진 나무 문의 잔해를 발로 치우며 조심스레 한 발 나갔다. 그 뒤를 하인리케가 이었다. 그들은 백 마디 말 대신, 등에 신호를 그리는 것으로 전달을 대신했다.
외침, 계단, 아래로, 1층, 정문.
고개를 끄덕인 세르야가 곧장 복도로 나갔다. 그새 누구의 잔해를 묻힌 건지, 도끼날의 겉에 온갖 파편이 잔뜩 튀어 있었다. 하필 추격자가 서 있는 자리 옆이 생존을 위한 도주로다.
면밀히 관찰할 시간 같은 건 이제 없으니.

 “당신의…죽은 연인 말인데!”

 입을 다물기도 전에 도끼를 든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주춤한 사이 하인리케가 먼저 복도 끝의 계단 쪽으로 돌진했기에, 세르야도 무턱대고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끗 차이로 도끼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평소 같았으면 짧았을 계단일 텐데도, 마치 연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괴성을 음악 삼아 두 명은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호텔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바쁘게 돌아가던 하인리케의 눈앞으로 우수수, 콘크리트 조각이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순간 계단 한 칸을 이르게 내려간 하인리케가 휘청거렸다.

 “조심해. 넘어진다!”
“나도 알아요. 소설은 호텔로 놀러 온 연인 중 한 명이 호수에 빠져 죽게 되면서 시작하죠.”
“어이쿠. 그래서?”
“그런데 사실은,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이었던 거예요. 연인이 제 상대를 호수로 밀어 죽인 거예요.”

 이번에는 잡동사니가 우수수 떨어졌다.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금속이나 플라스틱 따위가 더러운 바닥과 부딪혀 깨지며 걸음을 방해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단순한 소문은, 아닌가 봐!”
“나도 그냥 소설 소재 정도로만 생각했죠. 진짜로 있는 일일 줄은 몰랐네요…!”

 본래 로비였을 1층은 소파나 화분이 온통 엎어지고 깨져 있어 안락함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뢰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신중해질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추격자의 신음이 가쁘다.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문은 척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엉성하게 청테이프로 막아둔 모습이 얼핏 보였지만 힘으로 밀고 나가도 무리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끈질긴 추격.
조각을 피해 걸어가는 동안에도, 뒤따라오는 소리는 영 느려지지 않는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신발이 찢기는 것조차 무시하고, 바닥을 흥건한 피로 적시며 달려오는 사람을 막을 도리가 어디 있겠는가.

 “밀어 죽였다, 에서 끝이야? 다른 건 더 없어?”
“있어요. 이상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연인이 자꾸 호텔 안에서 보이고…….”

 어느새 팔을 휘두르면 꼼짝없이 반으로 갈릴 정도의 거리.
몇번 문에 몸을 부딪쳐보던 세르야의 옆에서, 하인리케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만일 이게 정답이 아니라면 함께 죽는다.

 “욕실에 당신 연인의 시체가 있어요!”

 찰나. 움직임이 멈추었다.
공중을 가르던 도끼가 허무하게 바닥에 꽂힌다. 그대로 희번득한 눈이 두 명에게서 멀어진다. 거의 맨발인 상태로, 손에서 무기를 놓은 채 정신없이 추격자가 뒤돌아 사라졌다.
그럼에도 몸의 힘을 풀어서는 안 된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니.
먼저 시선을 떼어낸 세르야가 어깨를 몇 번 돌린 후 낡은 문에 온 힘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강한 파열과 함께 몸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날아간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은 하인리케가 그를 잡아채지 않았다면, 지옥 입구에 마련된 대리석에 머리를 찧고 한 번 더 기절했으리라.

 어둡지만 빛이 들어오는 하늘이었다. 공기가 맑아 숨통이 트인다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간판이 삐걱거리며 겨우 발을 걸치고 있는 어두운 호텔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작은 크기였나.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세르야였다. 몸의 유리조각을 탈탈 털어내고, 잔상처를 훑었다.

 “환각이 자꾸 나타나 결국 망했다고 했어요.”
“허, 그거참.”
“숙박객의 병적 증상이 소문 나서 망한 호텔이라니. 그런 호텔이라면 진작 망할 만한 곳이었을 것 같네요.”
“동감이야.”

 물기어린 비린내와 싸늘한 바람에 두 명은 쫓겨나듯 좁은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저 멀리 희미하게 불빛이 보인다. 하인리케가 휴대폰을 들어 올리자, 환한 화면이 알려주는 시간은 열 시 반이었다. 피로와 긴장이 풀려서일까. 방금까지 겪은 일이 아득한 악몽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그러고 보니.”

 걸음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추격자가 뒤쫓아오는 기색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방금 우리가 겪었던 일이랑, 당신 소설이랑 내용이 같다고 했잖아. 마지막엔 어떻게 되는데?”
“네? 글쎄요. 나라고 집필한 소설의 끝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닌걸요. 특히나 단편 같은 경우에는. 그래도…머리를 굴려서 그런가, 이건 좀 떠오르네요.”

 빛을 향해 걸어갈수록 그림자가 길어졌다. 하인리케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욕실에 진짜로 연인의 시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체를 누가 건져냈을까. 마지막 정체는 밝히지 않고 끝냈었죠.”
“미스테리가 있어서 좋구만.”
“우릴 따라오던 미친 사람은 최소한 내가 사건 목격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로어에도 끝은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어쩐지 뒷목이 아파지는 기분인데. 세르야는 그저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을 열었다. 화장실에 들를 기운조차 없어, 하인리케는 그대로 침대에 제 몸을 던져넣었다. 눈만 올려 시계를 보면 아직도 10월 31일이다. 오후 11시 50분이라니, 이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극한 상황의 주인공이 되는 일도 한두 번이어야지.
뻑뻑한 눈을 어떻게든 감다 보면 작게 떠오르는 위화감이 하나 있다. 불을 켜지 않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침대 근처 바닥에 서린 물기는 뭐였을까. 끈적한 흙이 묻어 있었다.
더러운 바닥을 밟았을지언정 물 근처에는 접근한 기억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 비린내는 어디서 풍겨오는 것인지.
그러고보니, 욕조에 시체를 옮긴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대체 누구일까…….

 똑똑.
문을 두 번 노크하는 소리.
여전히 11월로 넘어가지 않은채, 시계는 할로윈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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