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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세요? 천하 오빠. 현금산의 호랑이 소문이요. 이립고 다니는 친구가 해준 이야기인데 달과 달의 경계, 달의 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현금산을 오르다 보면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해요. 그것도 그냥 단순한 고양잇과 짐승이 아니라 영험한 산신이라지 뭐예요? 그 호랑이와 만난 사람이 ‘착한 사람’이면 산신이 소원을 하나 이루어 주고 ‘나쁜 사람’이면 호랑이한테 잡아 먹혀서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해요. 그래서 그거랑 만나서 좋아하는 상대와 이루어진 학생이 있다거나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있다나? 사람을 잡아먹는 신기한 호랑이라니 익숙하지 않아요? 궁금하지 않아요? 전 궁금해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이고 어떻게 선별하는 걸까요. 그 호랑이는 사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고 오늘이 마침 31일 말일인데 같이 만나러 가지 않으실래요? 호랑이. 천하 형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그냥 보러 가는 게 아쉬우면 호랑이 사냥하러 가는 것도 좋고요. 개다래나무라도 챙겨야 하나?

 

[어때요?]

 

40자를 오래전에 넘겨 폭포처럼 길어진 문자 메시지가 어둠 속에서 푸르게 넘실거린다. 미리네 혹은 미로아는 휴대폰의 OK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자기가 조금 전에 쏟아낸 문자의 나열을 눈으로 훑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건 주변 사람들이 잊을만하면 있는 일이었고, 그에 대한 답은 상대와 시기에 따라서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했다.

 

특히나 이번 문자 상대인 염천하라는 경계심 많은 한 살 위의 지인은 그가 내뱉는 허무맹랑한 말에 쉽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으나 미리네는 이번 주제만큼은 분명 반응이 돌아올 거라 여겼다. 그가 생각하는 염천하는 지극히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상한 걸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혹은 어쩌면 이상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무언가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같으니 솔직히 미리네는 어느 쪽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뭐야 그 도시 괴담이랑 전래동화를 합쳐서 섞어버린 것 같은 소문은]

 

서른 번 정도 OK 버튼을 두드렸을 때 그런 감상이 돌아왔다. 어째서 권유에 대한 답이 감상인가 잠깐 생각을 하며 손에 잡히는 것들을 가방에 욱여넣고 있으면 이어서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가방의 지퍼를 닫는 소리가 휴대폰의 진동음을 덮는다.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어]

[그러면 됐어요.]

“... ... 망치 들고 갈까?”

 

짤막한 대화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탁탁탁. 미리네는 현관 앞에서 의미 없이 휴대폰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다가 가방 속에 넣고 애용하는 하얀 야구모자를 머리에 쓰고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타인의 답이란 딱 그 정도의 것이었다.

 

 

***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에요.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반가워요.”

“... ... ...”

 

야심한 시각 스산한 산중에서 조우하게 된 두 줄기의 빛이 눈앞의 미지를 들추려는 듯이 서로를 비춘다. 손에 들린 쇠망치는 그 빛을 은은하게 반사해 위협적인 존재를 과시하지만, 그것을 든 이는 흉흉함과 어울리지 않는 친절하고 일상적인 인사를 눈앞의 사람에게 건넸다. 

 

손전등을 든 청년은 어떠한 두려움의 기색도 없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청년, 염천하는 미리네로부터 연락을 받기 며칠 전을 떠올렸다. 그날은 우연히도 동선에 현미동이 포함된 날이었다. 아는 얼굴이 많은 곳이었기에 평소에는 오히려 가까이 가기를 피하는 곳이었으나, 일로 방문하는 것까지 꺼릴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주인에게 마주 안부를 묻는 유일한 카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학생, 오랜만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요즘엔 별달리 흉흉한 사건도 없어서 다행이지 뭐예요.

 

아이스티를 포장으로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익숙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대화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나온대!‘ ’뭐가?’ ’현금산에….‘ 안타깝게도, 염천하가 알기로 현금산에 나온다던 수많은 것 중 실제로 나온 것은 시체와 총을 든 살인자밖에 없었다. 카운터 끄트머리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플라스틱 컵이 놓였다.

 

“대신 이상한 소문은 돌아요.”

 

학생들의 속삭임보다 훨씬 뚜렷한 목소리로 그가 말해준 소문은….

 

 

“총을 든 군복차림의 유령이 나온대서 와본 것뿐이야.”

“그래요? 저는 역시 호랑이가 보고 싶어진 줄 알았어요.”

 

호랑이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야산에서 손전등을 들고 마주치면 사실을 말해도 변명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미리네라면 그 문자 메시지를 보낸 시점에 현금산에 도착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와 봤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만나든 유령을 만나든 야산에 대책 없이 오른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이 클럽 카벙클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니, 사실 대책이 없다기에 미리네의 차림은 지나치게 목적이 있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등산용 신발에 몸을 넉넉하게 가릴만한 우비, 수상할 정도로 큰 가방, 그리고 목적에 대한 의심에 확신을 더해주는 삽과 망치. 총을 든 군복차림 유령의 정체가 사실 미리네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삽은 왜 들고 온 거야?”

“요즘 세상은 흉흉하잖아요?”

 

농담이 아니라, 흉흉했다. 3년에 걸쳐 이어진 사건이 겨우 일단락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저 삽이 또 시체나 파내는 데 쓰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염천하는 앞서 걸었다. 달이 그렇게까지 밝은 날은 아니었기에 몇 걸음 나아갈 때마다 손전등으로 사방을 비추어야 했다.

 

“주변에 연락은 하고 왔어?”

“글쎄요, 천하 오빠형은요?”

“3일간 연락이 없으면 현금산에 실종자가 있다고 신고해달라고 말해두고 왔어.”

“철저하네요~”

 

염천하는 대체 왜 이렇게 자주 연락이 끊길 가능성이 있는 곳에 가는 거냐는 고용주의 물음을 떠올렸다. 그 말에 애매하게 웃기만 해도 그가 더는 묻지 않았던 것처럼, 그 역시 미리네에게 구태여 너는 어떻게 했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가파른 길이 나오면 염천하는 먼저 올라 로프로 몸을 나무에 묶고 미리네를 잡아 끌어올렸다. 고마워요, 지금 천하 오빠가 손 놓으면 전 죽겠네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화 미만 독백 이상. 어떻게 보면 소리의 반향과 비슷했다. 그런 속이 비어있는 미리네의 말을 끝으로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천천히 손전등의 빛이 닿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느 순간부터 들리는 건 서늘하고 비린 밤공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와 불청객들에게 밟혀 부서지는 낙엽의 소리뿐이었다. 유난히 가는 달은 올려다볼 때면 늘 같은 곳에 있고, 고개를 내려 앞을 보면 추상적인 형상을 한 새까만 풀숲밖에 없어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위를 향하고 있는 건지 아래를 향하고 있는 건지 바깥으로 가는 건지 안으로 가는 건지, 지면을 제대로 밟고 있는 건지 모든 게 모호해진다. 언젠가부터 핸드폰의 전파도 닿지 않고 있었다.

 

분명 이전에 뒤집을 기세로 돌아다닌 산이었음에도 밤의 산이란 매번 그 모습이 달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게 주변이 트여있다는 걸 머리론 이해하면서도 마치 아주 비좁은 비탈길을 걷는 것 같은 기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저 그런 기분이 들 뿐이다. 그들의 앞에는 호랑이를 떠나 어떠한 신비나 괴이도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등산객들이 버렸을 법한 쓰레기나 (수거했다)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산짐승의 흔적만이 (피해 갔다) 전부였다. 거기에 그들은 안도나 실망도 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예상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산에서 조난됐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보폭의 차이인지 체력의 차이인지 어느새 염천하의 등 뒤에서 걷고 있던 이가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입술과 숨이 스치는 마른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염천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어느새 밤공기에 차게 식은 손을 의식적으로 한 번 쥐었다 펴며 몇 년 전 조사를 위해 산에 오르기 전에 들은 주의 사항을 떠올렸다.

 

“체력과 체온의 유지겠지.”

“산에서 호랑이에 잡아 먹히는 사람보다 저체온증으로 생사의 경계를 헤매는 사람이 더 많을 거예요. 추워졌어요. 안아서 들고 가줘요.”

“겉옷 줄게. 이제 내려가자”

“전 천하 오빠가 차갑게 식어가면 다정하게 안아줄 건데.”

“전파 닿는 곳으로 가서 119를 불러줘.”

 

하산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려고 할 때 약속했잖아요, 그런 말과 함께 염천하는 뒤에서 손이 잡혔다. 아주 약한 힘과 미지근한 누군가의 체온과 실존감에 움직임을 멈춘다. 그는 하얀 손에 잡힌 자기 손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앞으로 천천히 빼내고....

 

“그건 너랑 한 약속이 아니니까.”

 

야산을 걷는 동행자가 이상해 보인 건 언제부터였을까. 염천하는 그 순간을 판정하는 데에 드물게 어려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느리게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분한 정적이 맴돌았다. 염천하는 한 명이 더 있던 아까보다 홀로 어두운 산에 서 있는 지금이 더 익숙했다. 소리 하나 없이 일행이 사라졌음에도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라는 감상만이 맴돌았다. 내려가는 길은 익숙했다. 이전, 학교에서 수상한 것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 때면 자신이 찾는 것이 나타날 일은 없을 걸 알면서도 올라오던 산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불쑥 열댓 명의 사람이 땅을 파며 수색하던 기억이 이질적으로 끼어드는 것만 빼면.

 

그리 긴 시간을 오른 게 아니었을 텐데, 어느새 새벽 동이 터오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시간은 오후 열 시. 경찰이 순찰을 도는 시간을 피해서 선택한 때였다. 그 시간에 우연히 미리네가 산 앞에 도착해 있을 확률은 어느 정도였을까? 변덕을 부리지 않고 곧바로 산으로 향했을 확률은? 그게 조난자의 환상이나 어둠 속에서 본 환각이 아니었을 확률은?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일정 고도를 넘어 불안정해졌던 전파가 돌아오는 신호였다. 평소라면 무시할 진동이었으나, 마침 시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오전 4시 45분이었다. 화면에는 어떤 연락도 와있지 않았다. 버튼을 몇 번 눌러, 염천하는 미리네와의 문자 내역을 확인했다.

 

[그러면 됐어요.]

 

오후 6시 40분에 온 문자를 마지막으로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꾹꾹 버튼을 누른다. 남에게 먼저, 그것도 이런 새벽에 연락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일단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 오늘 현미동에 온 적 있어?]

 

아침에 가까운 새벽에 보낸 문자치고는 빠르게 답이 왔다.

 

[아뇨? 산에는 안 갔어요. 그런 야심한 시간에 혼자 가는 건 위험하잖아요.]

 

현미동이라 에둘러 보낸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산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은 채로. 그러나 이번에도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럼 됐어]

 

이번에는 여기서 문자가 끊겼다. 아마, 이게 염천하와 미리네가 3년간 주고받은 것 중 대화가 이어지는 가장 긴 문자일 것이다.

 

등산로 입구가 다가온 것인지 지평선을 바라보면 언덕 대신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리네와 마주쳐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바로 그 위치였다. 염천하는 걸음을 서두르는 대신 몸을 숙여 바닥을 살폈다. 자신의 신발 자국 옆에는, 나란히 혹은 조금 뒤처져서 찍혀있어야 할 미리네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등산로와는 반대 방향으로 찍힌 고양잇과 짐승의 발자국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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