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시오오에다 마이고는 눈앞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무엇이든 훔치고 천장과 벽을 가뿐히 통과하는 괴도라도 하늘을 나는 책은 생경했다. 심지어는 콧수염이 달린데다 외안경까지 썼다. 하는 말은 어찌나 허무맹랑한지. 뭐? 내가 책 속의 인물이라고? 마크다운 투명인간은 뭐야. 왜 괴도가 아닌데?
“마크다운 괴도는 이미 존재합니다.”
“누구야!”
“마이고 님께서도 익숙하실 이름이죠. 마이루 님이라 하시면요.”
“할, 할머님?!”
딸꾹. 괴도, 아니 투명 인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뒤늦게 소개하자면 나이는 17세. 벽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할머니의 유품으로 투명화 능력을 얻었다. 그 상태로 벽도 통과할 수 있지만 능력이 하루에 한 번 원치 않을 때 발동되어 문제다.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조사하자 할머니의 스승―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손자를 만났고, 그 쪽도 사정이 길어 협력하기로 했다. 두 사람의 목표는 온 세상에 흩어진 대괴도 마이루의 유품을 회수하기다.
“자네의 할머님이 본모습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물건을 모았기 때문인가.”
“맞아요. 사서는 윗 기수 마크다운의 정보도 다 아나 봐요?”
“그렇다고 치지. 특히 내겐 남는 게 시간인지라.”
한적한 길거리. 두 사람의 곱슬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길거리는 한창 할로윈 페스티벌 중이었다. 이런 행복한 풍경 속에 비극이 찾아온다니 하지만 마이고의 경험으로도 이변은 갑자기 찾아와 일상을 망치곤 했다. 폭풍과 해일에 휩쓸린 연약한 인간은 평소라면 멀리했을 도박판에 앉거나 악마와 손을 잡는다.
“마크다운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비극이 발생하기 전으로 회귀하는 조정은 세계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입니다. 책은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 이미 적힌 문장 위로 줄을 긋는 손길에 억척스레 저항하죠. 제한 시간은 한 시간. 그전까지 비극의 원인을 발견해 주세요. 난도 상 개변은 먼저 선배의 시범을 보고 따라 하시면 됩니다. 부디 신중히 처리해 주시길.”
마이고의 담당자는 마크다운 불로불사. 목을 둘러싼 꿰맨 자국이 흉흉했다. 눈이 마주치자 상처는 캐시미어 목도리로 가려 버리고 대충 묶은 가느다란 곱슬머리가 어깨 위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흘러내렸다.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자 갈색 가죽 시계가 보였다. 시계판은 옅은 아이보리 색이다.
“그럼 괴도의 감에 맡겨볼까.”
“이건 제가 찾는 물건이 아닌데요.”
“그래서, 물러나시겠다?”
“…됐네요!”
일부러 자존심을 건들 때마다 발끈하는 성미 좀 고치라고 소꿉친구에게 수 어 번 잔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들어 봐. 어떻게 참아? 불로라더니 얼굴이랑은 전혀 달라. 안에 노친네가 앉았다니까. 말투가 문제가 아냐. 패션은 의외로 감각적이지. 하지만 시선이 말야. 거울에도 비치는 투명 인간은 자신이 돌아왔는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만 깨달을 수 있었다. 저를 좇는 눈길에는 전자동 센서만큼 빠르게 반응했다. 저 시선은 언제고 자신을 향한다. 계속 쳐다보던 탓에 오늘 이미 10분 동안 투명해진 줄도 몰랐어. 마스코트 씨 말로는 선배라 해서 다른 마크다운의 능력을 파훼하는 힘은 없다는데. 돌아가면 저 사람의 책을 읽어야겠다.
“선배의 책은 제목이 뭐예요?”
“달의 뒷면일세.”
“순문학?”
“아니, 편지라네.”
“팜플렛도 브로셔도 활자만 찍혔다면 상관없다더니.”
“하하. 내가 궁금한가?”
“솔직히 말하면, 네.”
“그럼 직접 물으면 될 것을.”
“대답해 주시나요?”
“으하하. 내 속이 그리 검어 보이남.”
“왜 자꾸 쳐다봐요?”
불로불사는 방금 한 말을 주워 담지 않고 충실히 신뢰를 지켰다. “아는 사람하고 닮았어.” 은근슬쩍 약관에 설명이 친절하다는 항목을 뺐지만 마이고의 눈치가 재빨랐다.
“할머님이요?”
“바로 맞추는군.”
“불로불사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을 떠올리다가요. 그러고 보니 불사와 편지의 관계성은 대체 뭐람.”
낙엽처럼 짙지만 단풍보다는 푸른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어쩐지 처량한 너털웃음이 퍼졌다.
“내 편지는 대부분 도서관의 동료들이 보냈어.”
“아하, 그랬군요. …잠깐만요. 그럼 책의 인물로서 도서관에 초대받았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아요!”
“내 책이 단권이라 했던가?”
“하아? 그런 게 어딨어!”
제 동기들처럼 좋아하는 음료라도 목구멍에 꽂아 넣으면 솔직해질까? 어쩌면 진실의 물약조차 목의 흉터를 벌려 바깥으로 흘릴지도 모른다. 불로불사란 폭풍이 들이닥쳐도 멀쩡히 헤엄칠 테니. 그가 자신을 선택해서 대답하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마이고에겐 지식을 획득할 권리조차 부재했다. 그치만 내가 누군데, 마크다운 투명 인간이자 괴도라고. 당신이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해도 나는 산과 언덕을 넘어 저 멀리 구름이 달을 가릴 곳까지 떠날 테야. 그리고 돌연 기습해야지. 두고 보세요, 승자는 나예요. 제 특기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랍니다. 우라시마 이부키!
앞서 말했듯 이변은 갑작스럽기에 변고이고, 기회도 마찬가지로 들이닥친다. 기회를 잡아 휘두름으로써 일상이 비일상으로 환원해 세계를 회전시킨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격자무늬 굴속, 마이고와 이부키는 한없이 위로 떨어졌다. 흑과 백이 연거푸 어지러이 교차했다. 슬슬 멀미 나요. 이러다 달에 도착하겠군. 어떻게 좀 해 봐요! 화자가 바란다면 고쳐 쓰기 전까지 무리야.
“그러니 시범을 보이지. 나는 월면의 불로불사. 비극을 희극으로 개변하는 사서. [솟아올랐다]를 [멈췄다]로 개변하겠네.”
할로윈의 죽은 자들은 찾아낸 활로는 천장의 구덩이였다. 저승은 이승과 모든 게 반대였으므로 땅 위로 도망치려면 땅 밑이 옳은 길이었다. 동시에 바닥은 천장이므로 한없이 가라앉는 대신 훨훨 날아올라야 했다. 결국 귀신들은 허공으로 [멈췄다]. “허공으로가 아니라 허공에서가 맞춤법에 맞잖아요.” “아서. 조사까지 바꾸기엔 횟수가 부족해.” 이부키가 안락의자라도 찾은 듯 여유롭게 공중에 착륙하는 동안 마이고는 멈춘 유령 사이를 헤집었다. 코르크판에 고정한 사진처럼 딱딱하게 굳은 영혼들을 계단 대신 밟아 오르자 어느새 길 잃은 귀신들의 마천루가 보였다. 아래에서 누가 발판을 잘못 밟아 떨어진 것 같지만 알 반가. 어차피 안 죽는데. 흰 식탁보의 절벽 끄트머리에서 마이고는 드디어 호박을 뒤집어쓴 화자를 마주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흐리는 범인이 당신이군요. 잭 오 랜턴!”
“할로윈은 그런 날이잖아. 이 모습은 그런 역할이고.”
“그 말투는 뭔가요. 배우라도 돼요?”
“모두 그렇지. 네가 책 속의 인물이라고 했을 때 많이 놀랐지.”
솔직히 기분 나쁘지? 이해해. 하지만 난 그 덕분에 지금까지의 인생은 헛것임을 깨달았지. 변화를 결심했고.
“안타깝게 명이 당한 허깨비를 진실로 되돌리며 살아 있는 뻔뻔한 거짓은 지옥으로 보낸다. 올바른 순리대로. 나는 죽을 필요가 없었어. 너도 그렇지.”
“무슨 소리예요. 저 살아 있거든요!?”
“저승에 들어온 이상 너도 죽은 목숨이야. 그리고, 알잖아.”
다리가 없는 잭 오 랜턴은 붙박이지도 않는다. 스르르 다가와 밤처럼 어두컴컴한 머리칼을 깃털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넘기곤 속삭였다.
“도서관은 마크다운들의 소원을 하나씩 이뤄 줘. 난 입맞춤한 망자를 되살리는 능력을 얻었지. 네 소원은 뭐야?”
“…할머님의 유품을 모두 모으고 싶어요.”
“거짓말. 사명과 소원은 달라.”
“……”
“어서. 너도 알잖아. 이런 기회 드물어.”
“…가고 싶어요.”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유령이 아니에요. 죽음을 맞이한 순간으로, 아니, 태어난 순간으로 되돌아갈래요. 이름을 바꿀 거예요. 작가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지었겠죠? 어떻게 사람 이름이 마이고(迷子)야, 그래서 난 평생 떠돌아야 하잖아!”
향년 열일곱, 니시오오에다 마이고는 죽었지만 죽지 못했다. 황천의 기슭을 방황하며 귀로를 잃어버린 채 도둑질로 연명해 왔다. 유령인 그는 하루에 10분 산 자의 눈에 비췄지만 두 눈에 비친 모습은 낯선 도둑. 평생토록 미아인 외로운 방랑자뿐이다.
“할머님은 변한 순간 기억을 잃었어. 하지만 난 모두 기억해. 가족, 학교, 좋아하고 싫어하던 것, 비밀 장소와 친구들과 공유하던 추억까지. 전부 손에서 빠져나가. 나는 대괴도의 손녀면서 바라마지 않는 그 무엇도 손에 넣지 못해!”
그러니 소원은 단 하나. 눈앞의 잭 오 랜턴은 필경 이루리라. 분노가 다음을 충동질하자 저를 도서관과도 이참에 작별하고 싶었다.
“눈을 마주하고 싶어요. 그게 내 소원이에요.”
“이루어지리라.”
“나는 보았네, 보름달이 떴거든.”
호박 머리의 뒤에서 튀어나온 인영이 그대로 둘을 붙잡고 절벽에서 추락했다. 괴도와 불로불사와 길 잃은 잭이 [절벽] 대신 [롯폰기]의 하늘을 날았다. 마이고는 온몸으로 도시의 야경을 담았다. 할로윈이 아니고도 행진이 이어지는 도쿄의 밤. 불빛의 수만큼 외로운 인간이 오늘도 골목을 헤맸다. 고독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한 달빛은 매일 차고 졌다가 이지러져 형태를 달리해 가며 지상을 비췄다.
“잭 오 랜턴! 자네는 죽은 자를 되살리지. 입맞춤으로 영혼을 빨아들여 평생 자기 뱃속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들어.”
“이런, 그건 영업 비밀인데.”
“이 육신은 천 년을 산 불로불사.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네. 자네를 쫓아낼 법도 알지. 자, 마이고. 봐. 이 자는 자네와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으니.”
이부키가 호박 머리를 걷어차자 텅 빈 목에서 안개가 빠져나왔다. 손목과 발목의 소매에서까지 흑마술의 저주 가루처럼 검은 연기가 돌출하다 차게 식었고 곧 불로불사의 품에는 송장의 상복만 남았다. 이제 도쿄의 어둠으로 추락하는 사람은 둘. 거센 바람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는 쉽게 묻혔다. 그래서 마이고는 크게 소리쳤다.
“왜 방해해요!”
“오답의 정정 역시 선배의 의무지.”
“내버려 둬요.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없잖아요.”
“부외자는 싫은가.”
“싫어요. 끔찍해요. 누구도 날 이해하지 않아요. 괴도는 평생 고독하게 죽어갈 운명이에요. 당신은 알아요? 아무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감각을? 괜히 물어봤네요. 편지를 받으며 일천 년을 살았다면 알 리가 없는데!”
고도 1km. 롯폰기 힐즈를 통과하려면 멀었다. 시간이 부족하면 늘리지. 이부키는 대답 대신 품에서 낡은 상자를 꺼냈다.
“첫 단추를 끼우려면 마이루의 유품을 전부 모아야 한다고?”
“과연 죽은 사람을 되살릴 위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요.”
“있네. 내가 경험자야. 마크다운 괴도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다네.”
딸깍, 불로불사의 옥갑이 열렸다.
“아마 이게 자네가 찾아야 할 마지막 보물. 하지만 지금은 내어줄 수 없어.”
“뭐예요, 당신이 갖고 있었단 말야!? 어서 돌려줘요!”
“약속해서 받아낸 물건이야. 권리는 내게 있다네.”
“그럼 나뭘 원하는데요.”
“계속 살아가. 언젠가 충분히 인생을 즐겼다 싶으면 자연히 나타나 오래도록 빌린 물건을 돌려주겠네.”
“아까 말 못 들었어요? 내 인생은 이미 끝났어요. 돌아가려면 당신 손에 든 물건이 필요하다고요.”
“끝까지 들어. 지금껏 이 순간을 기다렸단 말이다.”
자네나 마이루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키스했을 거야. 닳고 닳은 시체의 입쯤이야 얼마든지 바치지. 하지만 알아둬. 죽은 자는 무슨 수를 써도 돌아오지 않아. 우리는 경계에 갇힌 채 오도 가도 못하지만 이게 바로 생의 증명이다. 마이루가 나에게 보였어. 그러니 자네도 깨닫기 전까지는 안 돼.
“변화는 스스로 이루어. 내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손을 내밀 테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제멋대로 살 수 있어, 마이고.”
10, 9, 8, 카운트 다운이 이어지다가 어느새 해발 300m. 전망대의 유리창에는 그때와 똑같은 두 얼굴이 비쳤다.
“나는 달의 뒷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지금은 그저 찰나의 밤에 아침까지 머물러 주어.”
괴도는 어김없이 야경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하나 순간의 마주침이 반갑기는 매한가지더라. 할로윈의 밤이 깊어만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