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든 보면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만 무대에 올리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무대는 영생을 누리지 못하니, 화려했던 시대와 천재를 앗아간 원망으로 극본을 짜고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이 세상 그 누구도 원망스러워 견디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던 이는 하나씩 떠나가고,
처음의 마음은 변해버리고,
겨우 남아버린 사람들은 끝내 피투성이가 된 채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듯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될 즈음, 남자는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을 따라온 여자를 바라봅니다. 같이 죽어버리거나, 죽임 당하는 방법이라면 더 쉬웠을 거예요. 이미 한 번 길을 벗어난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게 되니까.
그러나 남자는 여자를 배신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삶을 갈구하는 것은 무릎으로 땅을 기는 것 만큼 참담했으나 그는 가진 재주를 모두 쏟아붓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결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바꾸고,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역할을 떠맡겨줌으로서, 사랑받아 마땅할 우리의 테레지아. 누군가의 테레즈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게 해결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ㅡ
원래부터 무엇을 취급하는 지조차 알기 어려운 불친절한 공방이었긴 했으나, 요 근래엔 거의 뜻을 잃었는지 문이 닫혀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카스파 씨가 안 보이네요?"
어쩌다 한 번 찾아온 이 손님이 오늘의 마지막 손님일 테였다. 더듬더듬 응대하던 엘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잔돈을 거슬러주기 위해 잘그락거리며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 깔았다. 공방의 주인되시는 분이 가을 휴가를 떠났다는 말에 손님은 대수롭잖게 그래요, 하고 수긍했다.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입에 담은 말도 아니리라.
"다음에 또 뵈어요."
참, 요즘은 날이 금방 추워지니까 엘리제 양도 감기 조심하시고요.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식상한 말과 함께 떠나는 이를 배웅하면, 이 햇빛을 쬐다 그늘에 놓아두어 모조리 식어버린 돌덩어리 같은 장소에 엘리제만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다. 여기서 아무리 기다리거나 시간을 보내도 카스파는 오지 않을 것이었다. '때가 되면 할 마음 생기겠지.' 라고 말하곤 집에 콕 틀어박힌지도 벌써 몇 주째던가. 엘리제 또한 나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영 불안해서. 그리고, 또…….
그리고 또.
"……."
누군가를 잠시 떠올리다가 관두는 그 짧은 사이에도 주변은 고요했다. 섬세한 손끝이 느리게 움직여 창문 유리를 살짝 꾹 누르다가 떨어진다.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동작이었지만, 생각보다 그리 자국이 짙게 남거나 하진 않았다.
창틀이 꽉 맞물려 닫혔는지 확인한 후에야 모든 뒷정리가 끝났다. 엘리제는 주변을 한 바퀴 돌듯 시선을 두며 하나하나 헤아려보고는 열쇠를 챙겨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문을 닫아버린 셈이지만, 이제 슬슬 그가 제 빈 자리를 알아차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가는 길에 간단한 장을 봐서 들어가야지. 그는 결코 제 스스로를 돌보지 않을테니까.
그녀는 또 한 번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꼭 다른 누군가를 빼다 닮은 얼굴로.
때는 몇 주 전. 공기가 차가워져간다 싶던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카스파는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 꿈얘기를 하는 것 마냥, 공방 내에 있던 거주지를 잠시 옮겨야 겠다고 말했다. 자잘하게 달고 다니던 기침이 유독 끊이지 않던 때였다.
카스파는 원래부터 성치 않은 몸인지라 잔병치레 자체가 많았다. 날 때 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세상을 떠돌며 제멋대로 살아가던 중에 크게 상했다는 것 같았다. 그는 과거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지 않는 사람이며 모호한 표현을 즐기는 괴짜였기에 이따금 내뱉는 말도 아주 단편적인 조각들에 불과했다. "어떤 감정이든 너무 과하게, 오래 품으면 병이 생기거든. 너는 이렇게 살지 마." 엘리제는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도 그 말에 동의를 표하곤 했다. 아무튼 교훈이라는 것은 당신이 제시해주는 것이 맞을테니까.
"또 어디 다녀왔어?"
여하튼, 원래도 금방 기분이 들쭉날쭉한 경향이 있다는 얘기인데……. 어딘지 잘 알지도 모를 외딴 시골집에 틀어박힌 이후에는 훨씬 더 까다로워졌다. 팔에 끼고 있던 장바구니를 미처 가리지 못하는 엘리제가 또 한번 애매하게 웃어보이자, 벽에 기대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쉬고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린다.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여기에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말했지? 누가 이런 거 시키지도 않았잖아."
"……."
카스파는 말없이 손을 뻗어 찬거리가 들었을 바구니를 들고는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엘리제는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그런 그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돌아보지도 않는 등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래.
요즘 들어 카스파는 조금 이상하다. 마치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군다.
"…못 본 사이에 몸이 많이 여윈 것 같아요."
엘리제는 퍽 자상한 발음을 내었다. 다정하고,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어투였다.
오랜만에 재회한, 이미 없는 누군가의 자화상처럼.
그는 잠시 멈춰섰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요즘 들어 엘리제는 조금 이상하다. 마치 유령에 씌인 듯 했다.
ㅡ
마른 기침 소리가 난다. 목 안쪽이 유독 건조했다.
혈맥처럼 돋아난 잎새가 붉게, 혹은 노랗게 변해가는 시기. 후덥지근한 공기를 피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들이 슬슬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그 좋은 날. 엘리제는 조금씩 그 조짐을 보였다. 이를테면, 평소에 손도 잘 대지 않던 극본을 허락도 없이 읽어보려 든다든지. 지나가다가 들리는 음악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보낸다든지. 유감스럽게도 카스파는 주변 사람을 돌보는 섬세함을 갖추지 못해서, 알아차릴 때엔 이미 걷는 속도마저 미미하게 달라져 있었다.
깨달은 다음부터야 원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어떤 기묘한 현상처럼, 잊었을 게 분명한 기억을 종종 떠올리고 지웠을 게 뻔한 이름을 불러온다. 빌헬름, 하고 속삭이듯 말하면 남자는 차마 웃지 못해 기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오는 길에 보니까……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무언가 꾸며주고 있더라고요."
"……."
"할로윈 분장을 미리 하려는 걸까…? 귀여웠어요."
"참고로 말하자면, 딱히 파티를 꾸릴 생각은 없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아이들을 위해 간식거리를 사다 둘 생각도 없고."
"알아요, 빌헬름. 아니, 카스파. 나가고 싶지 않은 척 하면서 나를 내보내려고 하지 않는 거잖아요……."
'죽은 자는 산 자를 마주치면 안되니까.' 꼭 그런 미신을 품은 사람 같아요.
꼭 잘 짜인 단조로운 관속에 같이 묻히는 것처럼요.
황금으로 자아내는 짚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은 섬세한 손끝으로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카스파는 차라리 여자가 자신을 아주 무시하거나, 왜 그랬냐고 물어오거나, 해치려 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손이 목을 죄여오면 안심할 것 같았다. 다정하게 뱀처럼 꼬드겨 심장을 앗아 먹었냐고 추궁해주면 차라리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사실은 사랑하지도 않았다고, 말해준다면 차라리 좋을텐데.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겠군."
잘 꾀인 밧줄에 목이 걸리기라도 한 표정으로 웃으며, 카스파는 힘없이 소파에 몸을 눕혔다. 테레즈가 돌아왔다면 엘리제는 어떻게 된걸까? 그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그래서 내가 필요했는데.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뱉자 어느 새 그 위에 더 짙은 그늘이 덮였다. 마치 빛 한 점 새어들까봐 막아주겠다는 것처럼.
"주무세요. 요 근래 계속 잠을 설치셨잖아요."
"……그러긴 했지. 언제 무슨 일이 더 생길까 싶어서."
"뭐가 그렇게 걱정됐어요? 안 그런 척 자꾸 지켜보신 거, 알고 있어요…."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어. 그리고 이유가 있다해도 너한테는 말 못하지."
깨어나면 다 꿈이었으면 하다가도 정말로 그러면 끔찍할 것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엔 짧은 말 한 마디로는 부족하다.
내가 직접 죽여버린 사람이 계속해서 어른거리는 그런 순간들. 평범한 사람들은 죄책감에 시달릴 때에 이런 현상을 보인다고 하지만, 카스파는 그것까지는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해봐야 한순간의 물거품. 어느 시점을 경계로 사라져버릴 죽은 자의 변덕.
"오늘이 할로윈인데. 나한테 장난은 안 치는건가?"
짧게 누군가 웃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이미 한참전부터 그러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는걸요……."
만일 회개하고 싶었다면,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남자는 고단함을 느낀다. 순순히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었다. 차라리 그때 그러지 말 걸 그랬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되돌아가도 똑같이 굴었을거야.
그냥, 물거품처럼 터져버리는 것보다 더 나을거라고 생각해서…….
…….
"……빌헬름."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할 수 있는 것도 많았을 텐데."
"……한 번 정도는, 이름 불러주시지……."
남자는 여자에게 왜 돌아왔냐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밖에 내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울 수 없는 시간의 간극이 사이를 가르고, 당신의 죄책감을 후벼파며 과거를 곱씹게하는 것도 내게 영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잊지 않았구나 싶어 잠깐 기쁘다가도 또 금방 시들어 버렸다. 남을 피흘리게 하는 무대를 그리도 끔찍하게 자아냈으면서 이제와서 다 버린 사람처럼 굴어도.
테레즈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그에게 기댄다. 느리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낡아빠진 시계 태엽같은 관계였다.
이러고 있으면 잠들 수 있을까?
영원히 깨어나버리지 못하게 되면 그는 또 한 번 내게 후회할까.
만일 이대로 내가 사라지며 그의 숨까지 앗아가면 어떻게 될까?
혹은, 눈이 떴을 때 또 한 번 '내'가 죽어 있다면, 이 남자는…….
ㅡ
엘리제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따뜻한 집안이 아니라 어두운 공간의 한 가운데였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무언가 윤곽 같은 것이 들어오지만 위안은 되어주지 못했다. 이미 사용하지 않게 된 낡은 집안이나 헤진 가구들이 쓰러져 볼품없이 굴렀다.
밤바람이 스치자 얇은 옷을 입은 살결이 흠칫, 하고 굳었다. 괜스레 섬칫한 기분이 들어 제 팔을 문지른다. 요근래에 이런 일이 잦았다. 아주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주변이 변해있다거나, 무언가 낯설게 느껴지거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싶어서 몇 번 알아보려는 해보았지만 그 무엇도 속시원한 해결책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카스파 또한 요 근래 들어 자신을 대할 때 다소 거리를 두거나 무언가 얼버무리려는 행적이 많이 보였었다. 그리고 기침도 잦아지셨고. 꼭 시들어가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다보니 밖은 그래도 아직 소란스러웠다. 아이들끼리 웃는 소리, 저마다 달콤한 것을 나누는 순간, 잃어버린 것을 추억하며 불 붙인 촛불. 이제는 서로의 안녕을 고하며, 작별인사를 하는 시기. 그리고 온기 하나 남지 않은 주변.
다들 저렇게 당연한 듯이 안온하고 행복한데도 이상하게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색을 빼앗겨 점차 흰 도화지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엘리제는 그가 자신을 찾아야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할까, 따위를 고민하며 망설이다가 이내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는 걸 핑계삼아 더듬더듬, 문을 열고 나섰다. '무언가 나쁜 생각'을 한 것 같았고, '무언가 나쁜 상상'을 한 것만 같은 불편함이 찌꺼기처럼 들러붙었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였지만, 손아귀 틈새로 사라질 수 있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경종을 울려왔다. 무언가 꽉 차있다가 빠져나간 듯한 감각. 엘리제는 제 몸속을 차지하고 있던 어떤 것을 알지 못했다. 남아버린 자신은 그 어떤 껍질 같은 것처럼 느껴져서.
송장이 산 자의 손에 의해 언덕을 넘게 되듯, 유령처럼 보이게 꾸민 헝겊 천을 입고 하품하거나 어미의 품에 안겨 가는 아이들을 스쳐지나가며, 엘리제는 누군가를 찾았다. 카스파 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방향이 어느 쪽이더라? 왜 하나도 모르겠지? 헤매다 보면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홀로 남겨진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할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걸음도 멈추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어두운 공간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저 너머에 꼭 누군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염없이 흐릿하고 얇은 베일천처럼 너울거리는 무언가.
"……."
자신과 아주 닮은 얼굴의 여자가 꼭 이쪽을 보며 웃는 것처럼 보였다.
"왜……."
이상하다. 자신은 저런 식으로 웃지 않는데.
ㅡ
깨어나는 것이 꿈이듯,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시 밖으로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엘리제는 그 날,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자신을 찾아 팔을 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기던 손길을 경험했다.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등불이 귀신처럼 떠다녔고, 휘청휘청 걸어 들어온 집안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카스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돌아왔구나." 라는 말을 했다.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엘리제는 묻지 않았다. 다만, 아주 침울한 목소리로 "네, 돌아왔어요."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마냥 우울하고 슬펐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돌려받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때로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가득하며,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상심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자신의 몸뚱이를 빈 관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몸을 눕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다만, 한 가지 낙을 골라보자면,
"이제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까."
"그래, 이제 할로윈이 지났으니…… 크리스마스엔 뭔가 해볼까."
섬세한 손길로 그 관이 꽉 쥐여누르는 남자의 손일테였다. 그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차라리 그것이 엘리제의 소소한 위안이 되었다.
잠시 허공을 멍하게 보던 엘리제가 느리게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