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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상처주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관계가 있다.
  하네노조 키리야는 그런 이유로 미야자와 마유의 최악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되면 상처가 다 낫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영원처럼 간직하고 싶어했다. 좋아하는 것만 먹고 싶어하는 이 마음이 뭐가 잘못되었겠는가?

 

 

  미야자와 마유는 언제부턴가 꽃향기, 부드러운 풀밭을 맨발로 걷는 감촉 등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그 빈 자리를 소독약의 싸한 냄새, 천에 피가 묻으면 어떤 식으로 얼룩이 지는지, 묵직한 도끼의 날이 얼마나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선득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이 들어찼다.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이런 의미로 쓰는 말이 아닐텐데 언제부턴가 그리 되었다.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은 종종 의욕을 죽이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세상은 언제부터 이상하게 변했다. 불행이 꼬리에서 꼬리를 물듯이 이어져 약한 개체부터 변화시켰다. 둥지를 빼앗으려드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번식법이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기생이었다. 기존의 인격을 잡아먹어 버리고 그 몸을 새로운 집으로 삼아버리는 종들. 미야자와 마유는 그것들을 괴물이라 여겼다. 겉모양새는 사람과 흡사하지만 구조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게 변해버렸기에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었다. 부러진 뼈도 금방 붙고 움푹 패인 살조차 마르지 않는 샘처럼 금방 차오르는 그런 생명체들. 삶과 생의 무게감이 너무도 달랐다.
  그들과 같은 부류인 동거인, '괴물' 하네노조 키리야에 의하면 적어도 이 부근에 남아있는 인간은 미야자와 마유 외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아쉽다. 마유가 원한다면 친구 삼으라고 잡아올 수도 있었는데." 태연하게 그런 말을 던져오는 목소리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보다, 깜깜해지는 시야에 낙담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때마침 들여다 보고 있던 책장에 너무나 흥미로운 게 적혀있다는 것 마냥 구는 게 먼저였다.


  "……."


  둘이 살기엔 충분하고, 한 명이 평생 갇혀살기엔 지나치게 고즈넉한 집안이 오늘따라 조용했다. 평상시였다면 하얀 이불에 덮인 곰인형처럼 나태하게 굴었을 키리야가 어쩌다 한 번 외출을 나가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야자와 마유를 이 집에서 살게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몸뚱아리에 어떤 손상이 가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는 마유의 혈색이 조금 나빠지거나 뺨이 약간이라도 수척해지면 뭐라도 해주고 싶어했다. 불필요한 친절이라고 생각하여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그가 떠나있는 사이 조금이나마 혼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그는 기만처럼 잘린 부위를 되살리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미야자와 마유가 하루에 몇 번이고 보곤 하는 현관문. 문고리에 손을 댄 적이 벌써 한참 옛날은 되어가는, 저 무거운 경계선을. 너무나 쉽게…….

 


  쿠르릉,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조금 어둡다 싶었는데 물기를 머금은 구름들이 아래로 내리깔린지 오래였던 모양이다. 빗줄기들이 꽤 거세게 떨어지고 있었다. 타타탁, 때려오는 물방울 소리에 그가 우산을 가져갔던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바로 다음 순간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그녀는 어렵지 않게 문을 등진다.

 

 



  마땅히 홀로 할만한 게 떠오르지 않아 집안 청소를 하던 마유가 굽혔던 허리를 펼 때였다.
  쾅!
  다소 급하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몸이 굳었다. 하네노조 카리야는 저런 방식으로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이 주변에 자신에게 '그나마' 친화적으로 구는 괴물은 그뿐이었다. 괴물은 보통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니 모르는 집에 들어온다고 힘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 드문 경우가 지금 발생한 것일까? 다시 한 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 비하면 굉장히 정중한 편에 속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급한지 연달아 두드려대었다. 똑똑, 똑똑똑. 재촉하는 듯한 그 소리에 마유는 뒷걸음질을 한 번 쳤다가 문가에 기대어 두었던 손도끼를 집어들었다.
  이 집은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커튼을 빈틈없이 닫고 걸쇠란 걸쇠는 다 걸어 잠근 곳이었다. 마유는 문을 열기 전에 커튼 사이를 조심스럽게 벌려 방문자를 살펴보려 했다. 굵은 빗줄기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훨씬 큰 체구의 남성의 실루엣은 분명히 보였다. 비에 잔뜩 맞아 떨고있는 몸, 숨을 헐떡이느라 가파르게 움직이는 흉통, 푹 고개 숙인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그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마유는 의아함을 느끼는 도끼를 든 손을 내리고는 남은 빈손으로 문을 열었다. 제 발로 나갔던 하네조노 카리야가 대체 왜 겁에 질린 사람처럼 돌아온건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보면 곤란하니까 어서 안으로 들여야지.


  "열쇠 있잖아.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라고 말하려고 하며 마유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릴 때였다.
  잔뜩 젖어 허공을 방황하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마, 마유."


  매일 들었던 음성인데도 낯설었다. 마치,


  "미안해. 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평생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 어떤 사람의 것처럼.


  "기억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커다란 사내의 그림자에 표정이 묻힌다. '괴물이 되기 전의 하네조노 키리야'의 눈 밑으로 젖은 기운이 번들거렸다. 이미 괴물에게 의식이 전부 살라 먹혀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횃불일텐데도 그 존재감은 너무나 생생했다. 마유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제 목소리가 너무 낯설다고 생각했다. 길 잃은 아이가 보호자를 만나 어쩔 줄 몰라하는 것 마냥, 긴 팔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안아올 때에 그의 어깨 뒷편으로 번쩍이는 노란색, 호박들과 장식된 사탕들을 발견한다. 어느 새 한바탕 쏟아지던 비가 가늘어져서, 누군가 쓰러진 깃발을 다시 고쳐 세우고 있었다. 괴물들은 가끔 자신에게 어느 정도 남아있는 인간의 의식을 재현하는 놀이를 꽤 즐기는 편이었다. 마유는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10월의 마지막 날,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척척하게 젖은 몸이 붙어오니 생리적으로 불쾌함이 앞서는데도 밀쳐낼 힘이 없었다.
  아무도 돌아올 사람 없어서 잊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할 수만 있다면 영영 잊은 채로 있고 싶었다…….

 


  하네조노 키리야는 '여전했다.' 덩치만 크고 여전히 심성이 여리고 실속이 없었다.
씻게 하고는, 마른 수건, 옷을 가져다주니 그제야 조금 부끄러운지 눈둘 곳을 몰라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도와줄까, 하고 한 마디만 했지만 역시나 거절 당했다.

  그를 혼자 두고 주방으로 들어와 그가 들고 있던 봉지를 풀어보니 우스꽝스러운 젤리나 호박 모형부터가 눈에 들어왔다. '괴물'은 먹을 걸 사러 나갔으면서도 도중에 한눈을 팔았던 모양이다. 보나마나 놀란 얼굴을 보고 싶었다거나, 재밌어 보여서 그랬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길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던 '하네조노 키리야'가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괴물은 인간의 의식을 잡아먹고 그 몸을 제 것으로 차지한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왔다고 해도 바로 마음 놓고 안심할 수 있을리가 없다. 괴물의 괴물에게 전염되어 의식이 사라질 수 있는 일일까?


  한참이나 서늘한 눈으로 손에 들린 것들을 들여다보전 마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가 그렇게 너를 그리워했을 리가 없는데. 어쩌면 내가 이미 미쳐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죄책감 같은 것에.

 


  "어, 어떻게 지냈어?"


  물렁한 고기에 칼집을 내곤 허브 소금과 후추를 뿌려 간을 한다. 올리브유를 조금 붓고 짧은 시간 재워두었다. 한쪽 팔이 잃은 사람이 제 몸을 스스로 씻기까지는 시간이 약간 걸렸으므로 그리 힘들거나 지루한 일은 아니었다. 센 불을 올린 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스테이크를 내려다보는 마유는 영 무표정했다.
다행히, 카리야는 식탁에 앉아 그 등만 바라보고 있으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마유는 키리야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어설픔과 겉멋내는 허세를 읽어낸다.


  "…그냥, 평범했어. 늘 똑같거든."


  매일같이 잠들고 매일같이 일어나 네 얼굴을 한 괴물을 만나. 이 세상은 죽어가는 것 같고, 나는 삶의 낙을 느끼지 못하지.


  "그랬구나."
  "…넌?"
  "난……. 그게……. 모르겠어.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러고보니 아까도 그런 말을 했었지."


  버터가 녹으면서 좋은 향이 난다. 붉은 겉면이 갈색으로 익어가는 것을 보던 마유는 그것을 조금 옆으로 밀어내고 남은 곳에 아스파라거스를 돌려 열기를 옮겨가기 시작했다.


  "응, 뭔가 있잖아……. 이상하게 들릴 것 같긴 한데."


  치이익, 하는 소리.


  "머릿속의 사진 같은 게 불타서 새까맣게 변해버린 느낌이거든.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주 아플 때 마유가 돌봐줬었던 것 같아. 유일하게 그 기억만큼은 또렷해."
  "……."
  "계속 누워 있었어. 약냄새가 났고. 그런데, 마유가 부르면 바로 와줘서 그건 좋더라고."
  "……."
  "…아, 이런 표현은 좀 그랬나? 고맙고 기쁘고, 아무튼 그랬다는 뜻인데."
  "…그래."


  마유는 찬장에서 흰 그릇을 꺼내온다. 꽤 간만의 성찬이었다. 혼자 식사를 할 때엔 도무지 정성을 낼 의욕이 없어서 부엌의 불을 오래 켜둘 일이 없었다.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담아도 약간 허전해 보여서, 고민하다가 렌틸콩을 곁들이기로 해봤다. 키리야는 은근히 겉멋내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서 입에 대는 것도 보기 좋을 수록 좋아했었다. 그걸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좋아했었고, 그걸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아했다.


  "오랜만이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
  "당연히 끝내주지! 솜씨 좋잖아."
  "널 병간호 했을 때 죽밖에 해준 기억이 없는데."
  "그러니까……, 그게…… 원래 요리 잘하는 사람은 죽도 잘 끓인대."


  그걸 말이라고 하는지. 어설프게 주워섬기는 걸 듣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괴물'은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 좀 더 확신을 담아 말했고, 그것이 틀려도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접시를 들고 몸을 돌리자, 키리야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상황들을 깨끗하게 모르는 상태라 자전거를 처음 타본 아이마냥 아직 균형을 채 잡지 못했다.


  "옮기라고 시키지 그랬어."
  "괜찮으니까 그랬지. 앉아 있어."

  그리고는 그제야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주본다. 근사한 식사를 앞두고 나누기엔 지나치게 평이한 말들이 지나갔다. 마유는 보통 듣는 쪽이었지만, 키리야는 그 대답을 조르는 쪽이 능숙했다. 마유는 천천히 키리야가 기억하지 못한 옛 것들을 일러주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평화로웠던 나날들.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렸고, 그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쇼핑을 가지 않은 지는 오래 됐으며 그것에 아무런 유감도 들지 않는다는 말까지.
  잘 갈린 나이프가 스테이크 위를 부드럽게 긁어내듯 칼집을 낸다.

 

  좀 더 솔직한 것들을 알려줄 수는 있었다. 여자는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의 피를 바닥에 흘리게 해본 적이 있으며, 괴물은 매일같이 유령처럼 들러붙는다고. 이미 사라져버린 남자의 겉거죽으로 행동하고, 웃고, 말하고, 잔인한 사람이 개구리를 가져다 놀 듯이 들여다보곤 한다고.


  그래서 차라리 내가 지금 도끼로 네 목을 내리쳐준다면, 존엄성이고 뭐고 다 훼손되어버린 너는 사람으로서 생을 끝낼 수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하하하."


  하지만 남자는 너무도 소년처럼 웃고,


  "……."


  그것은 너무 기억속의 그 모습과 똑같아서.
  그래서 불쑥 말이 나오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키리야, 나는,"
  "사실 내가 어떻게 사냐면,"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비바람이 불며 커튼이 흔들렸다. 아, 할로윈의 간식거리와 등 장식을 기대하는 아이들이 한 명도 남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이제 달래줄 사람 또한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데.
  자정이 되면서 시곗바늘이 돌아간다. 우리에겐 얼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었는지 재어보기라도 했다면 다음의 이야깃거리라도 되어주었을까?


  "알아. 여전히 하던대로 나한테 끔찍하게 대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마유는."
  "……."
  "나는 좋아해. 네가 나한테 상처주는 거. 그럴 때마다 너는 나한테 죄짓는 거잖아. 나를 약하게 만들어야 너도 안심하고 날 돌볼테고."
  "……."
  "그때 표정을 보면 이게 살아있는거구나 싶고 그렇거든."

  마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 되돌아왔던 온기가 모든 것이 식어버리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죽은 자는 본디 그리 갑자기 찾아오고 갑자기 떠나는 거던가?


  "오랜만의 재회인데 그런 시시한 얘기나 하고, 조금 실망이지만."
  "해피 할로윈, 미야자야 마유."
  "내 작은 장난이자 선물이야."


  마유는 슬픔을 느끼지도, 안타까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키리야와 한 얘기는 너무나 단순하고 무난해서 꿈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비가 그치지도 않았는데 가버렸구나.' 그러니 그것은 여자를 상처입히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관으로, 산 사람은 식탁 앞에. 
  단지, 손끝에 힘을 주어 스테이크의 한 부분을 끊어내듯 잘라냈다.

  아주 잠깐의 기억까지도 모조리 담아, 마치 생살을 잘라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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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할로윈  하네조노 키리야- 미야자와 마유]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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