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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림의 죽림은 의흥 소가의 지지 않는 위상을 암시하듯 사시사철 푸르고, 끝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빼곡하게 들어찬 대나무는 가느다란 이파리로도 하늘을 쉽게 가렸으니 방문자가 머리 위를 보고 시간과 위치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몇 겹으로 둘러친 진법으로 사람의 발길을 막아두지 않더라도 길을 잃고 불의의 사고를 겪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대부분은 일시를 정해 미리 허가를 구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입구에서 제명림의 사람에게 안내를 청하는 게 기본 절차였다. 바깥으로 나도는 것도 아니고 안에 머무르고 있다면 갑작스러운 방문자와의 조우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특히나 밤에는 그렇다.
오늘따라 늦은 시간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 내내 초를 켜두었던 영하가 손으로 심지를 잡아끈 바로 그 순간에. 안이 더 밝을 때는 바깥의 그림자가 들지 않는다. 불청객을 발견하는 것은 어둠에 잠긴 순간. 어둠의 명도가 다른 것을 기민하게 잡아챈 영하가 몸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초 위로 흩어지는 연기 따위와 헷갈린 것이 아니다. 분명한 어둠이 그곳에 있었다.
“…….”
누군가 무어라 말을 했는데 속삭임이 바람결에 섞여 영 불확실했다. 영하는 대답하지 않았고, 방 안에는 정적만 흘렀다. 네모나게 진 구역이 하나의 봉인이라도 되는 양. 빛처럼, 소리 역시 빈 곳으로 흐르기 마련. 바람 소리, 이파리가 저들끼리 사락사락 부딪히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그중 사람 소리라 할 법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 밤이 되면 바람이 차고 거셌다. 머리칼이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조금은 날 법도 했는데. 영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잔상이기를 바랐던 그림자는 여전히 굳건했다. 윤곽이 정리되지 않아 오직 덩치가 크다는 것만을 가늠할 수 있는 상대는 대답이 들려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듯했다. 재촉하지도 화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객으로서는 당연한 미덕이나 밤에 오는 손님이란 미덕보다 악행을 쫓는 법. 영하가 숨을 죽이고 당장이라도 방을 두르고 선 기관을 작동시키려던 찰나, 모든 균형이 어그러지기 직전에 상대가 말을 걸었다.
“들여보내 줘. 바람이 차다.”
“주엽?”
“그래.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 내주지도 않을 테냐.”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특정한 인물의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비슷한가 하면 쇳소리가 섞인 듯했고 다른가 하면 익숙한 지점을 찾아내게 했다. 그러나 소리를 걷어내고 말만을 두고 본다면, 분명 기억 속의 말씨와 빼닮았다. 회랑과 영하가 곧잘 어울려 논 게 꼬박 스무 해다. 오래 못 들었다고 완전히 잊을 가락이 아니다. 무공을 갈고 닦더니 기척 없이 등 뒤까지 다가와 사람을 놀래키는 데에나 써먹던 어린애. 나이만 먹었지 끝까지 머리는 크지 않은.
“장난치지 마십시오. 누구십니까?”
“좀 오래 못 봤다고 이러는 거냐? 내가 널 두고 오래 돌아다녀서 심통이라도 났어?”
“제게는 이리 늦은 시간에 찾아올 객이 없어서요.”
“잔소리였군. 예의를 모른다고 꾸짖어도 어쩔 수 없다. 겨우 시간 내 온 게 이거야.”
“그러면…….”
“그러면?”
“왜 밖에 우두커니 서 계십니까? 이 문은 밀면 밀릴 뿐이고. 제가 아는 당신은 이런 것쯤 가볍게 밀쳐내고 들어올 사람인데.”
“그건 안 돼.”
“그러니까 어째서.”
“그게 규칙이라 그렇다. 네가 들여보내야만 들어갈 수 있어. 허락을 구해야만 한다.”
“주엽이 규칙 같은 걸 지킨 적이 있기나 한가…….”
“소양.”
어린 이름이 불리자 영하는 이어지던 대화를 그만두고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간 영하는 많이도 자랐다. 이제 소영하를 두고 양이라 부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는 제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 오래고,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무인이었다. 혀가 간교하니 섬설이라 비꼬던 이들도, 제명림에 처박혀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비웃던 사람들도 빛나는 위명에 떨어져 나갔다. 그를 앞에 두고 어린애 취급할 수 있는 이는 그만한 친분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어려웠다. 영하는 까다로운 심미안만큼이나 사람 보는 눈도 높아 사람을 가려 사귀었으니. 영하의 날 선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흔들리는 걸지도 몰랐다. 이제는 그를 어린애처럼 어르고 달랠 이도 많지 않아서. 곁을 허락한 이에게만 이름도 허락했더니, 이제는 선후가 뒤바뀌어 그 이름만 들으면 돌연히 약해지는 걸까.
“너…….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가족들을 보러 다녀왔지.”
“가족들? 청유문에?”
“아니, 다른 먼 곳.”
영하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비명이 울렸다.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보다 훨씬 분간하기 쉬웠다. 말소리에는 여러 의미와 감정이 담기지만 비명에는 웬만해서는 몇 가지 의미만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 경고, 불안 등의 자질구레하게 부정적인 것들. 흐려졌던 마음의 방비가 단단해지기까지는 순식간. 영하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고, 그 앞에 사람 그림자가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다. 나가기 위해서는 저것을 지나쳐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을 여는 것은 상대를 들이는 행위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친구처럼 말을 거는 저것의 정체를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몇 번이고 문을 향해 손을 뻗었던 양은 제 양 소매를 붙잡았다.
소란했다. 먼 곳에서 불을 당겼는지 한쪽 창이 희미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짙어지지도 흐려지지도 않고 여전하다. 고함 소리가 들려오지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누군가 공격 당했을까? 부상과 죽음이 얽혀 있다면 영하가 이곳에서 무례한 불청객과 대치하고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옳은가?
“네게 줄 선물도 샀는데 나와서 보지 그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림자가 영하를 어르듯 회유했다. 방 안의 영하에게도 닿는 소란이 저 위치에서 들리지 않을 리 없는데도 주변이라고는 아랑곳 않는 태도였다. 그것이 더 비현실적이라, 영하는 차라리 자신이 순식간에 잠들어 꿈을 꾸는 건지를 스스로 의심해볼 정도였다.
“머리끈인데 옥도 달렸다. 이걸 누가 산다는데 내가 양보해 달라고 한참 실랑이해서 얻은 거야.”
“…….”
“이것도 마음에 안 드나?”
“저 멀리 불빛이 보여? 왜 저렇게 소란한지 알아?”
“글쎄다. 꼭 신경 쓰지 않아도 될걸. 아…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 정도야 자주 들리잖아.”
영하가 있는 자리에서는 거기까지 들리지 않는다. 그저 겁을 주는 걸지도 몰랐다. 바깥에 있는 것이 어떠한 악의를 가진 괴력난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말투가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불청객은 정말로 영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를 이어갔다.
“나도 자주 싸움에 휘말리는 편이라지만 지금 또 네 앞까지 왔잖냐. 네 사형제들 재주 좋다며. 후기지수들도 하나같이 빼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만. 진아는 잘 있나? 그 녀석이 제일 무공에 재주가 있어 보이던데.”
“……그 애는 얼마 전에 수행을 나갔어. 다 커서 벌써 초출내기가 됐지.”
“그 꼬맹이가? 수련한 지도 십 년이 안 된 게.”
“작년에 넘겼어, 십 년.”
“벌써 그렇게 됐나.”
누군가의 가장이라고 하기에는 식솔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았고, 그런 것치고는 아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 제명림의 사정과 동떨어진 암수라면 미리 준비해 아주 잘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은데. 영하는 이 애매한 간극에서 오는 어색함의 연유를 알았다.
“네가 어디로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은 지가 삼 년이니 그 사이 시간이 지났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불청객이 가장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다. 주엽, 청유문의 회랑은 삼 년 전 훌쩍 떠나더니 그대로 종적을 감추어 사라졌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절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오며 꼬박꼬박 연통을 주던 이였기에 모두가 의아하게 여겼으나 수소문을 해도 그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시체조차 없었기에 죽음은 상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강한 무인이었으니 객지에서 비명횡사 했으리라 가정하는 것보다, 어떤 문제가 생겨 발이 묶였거나 심경의 변화로 속세와의 연을 끊었으리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어울렸다. 그런 그가 정말로 이번에 돌아온 거라면.
“삼 년이 지났다고?”
“무슨 얼 빠진 소리야. 날 지나는 건 몰라도 계절 바뀌는 건 알았을 거 아니니.”
“난 분명…….”
휘이익, 끼이익, 쿠르릉… 하는 소리가 대답 대신 났다. 성난 바람이 점차 세를 더하는 모양이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어수선한 기척과 섞여 꼭 사방이 화를 내는 것만 같다. 영하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문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난, 어, 그러니까.”
“주엽? 괜찮아?”
“분명 볼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왔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왔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아니, 아니지…… 그래,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 이게 왜 자꾸 나를 쫓아오나 했어. 여기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횡설수설한 목소리가 바람을 연주 삼아 이어졌다. 노랫소리라기에는 혼란하고, 떨렸으며, 일견 공포심까지 엿보였다. 영하가 말을 잃은 동안에도 격정에 찬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주 많은 인원이었다. 그래도 못 이길 정돈 아니었어. 요즘의 어중이떠중이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으니. 그런데……. 그래, 어린애가 있었어. 마을에서 마주쳤던 녀석.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만 내 뒤를 쫓아오기에 거하게 혼을 냈는데도 포기하지 않아서 근성 있다고 칭찬도 했지. 분명 자라서 크게 될 녀석이라고. 그렇게 말했으니 잘 자라는 꼴은 봐야지 않겠어. 거기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실력도 인의도 없는 무뢰배에게 잡혀 허망하게 떠나기엔 어렸어. 그래서…….”
그림자가 일렁, 일렁. 더 이상 그것은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듯 떨리고 흔들려대느라 마구 일그러지고 있었다. 양은 가슴 밑바닥에서 공포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어둠을 떠도는 공포. 불온한 공기. 억지로 내는 듯 쇳소리를 닮은 말들. 영하는 소매를 붙잡았던 손을 떼어내 바닥을 짚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몸이 쓰러질 것 같아서.
“분명 깊게 찔렸는데, 고통을 감내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였다. 어떻게 왔지? 집은 너무 멀었어. 청유문까지 가기엔 시간이 모자라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네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니, 어디든 좋으니 집으로 명명되는 곳에 들어가고 싶었어. 내 자리가 있나 하고.”
아연한 말끝은 힘이 빠져 멍하게도 들렸다. 영하는 몇 년간 미뤄두었던 가정을 끌어내야 함을 깨닫고 말았다.
“엽아.”
“응.”
“널 들여보낼 순 없어.”
망자는 산 자의 세계에서 멋대로 행패부릴 수 없다. 허락을 구하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갈 수 없고 몸을 누일 수도 없다.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미련을 어느 자리에 묶어두어 제대로 해결되었다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영하는 문득 어질해져 입을 벌린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무래도 어둠 속을 너무 오래 노려본 모양이다. 시야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면 사람은 쉽게 중심을 잃고 마니까.
“왜 안 되는데?”
“그야, 엽아, 너는 죽었으니까.”
“…….”
“그러니 돌아가. 곧 해가 뜰 거야.”
“……그런가.”
이상하게 그 허탈한 목소리만, 딱 그 한마디만 온전하게 들렸다. 영하가 기억하는 그 목소리, 그 어조로.
제명림의 아이들은 누구나 무너지지 않는 성을 지어 올리는 법을 배운다. 바깥으로 나서지 않고 상대를 끌어들여 무너트리는 방식의 싸움이다. 나가지 않는다. 견딘다…… 아무리 약해져도 그것만은 영하에게 가장 손쉬운 방식이었다.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나 하자. 다른 건 기억이 안 나?”
영하의 목소리는 어린애를 달래듯 나긋했다. 실제로 몇 해의 나이 차를 두고서도 의식해 손윗누이처럼 군 적이 없는데. 회랑이 애 취급을 받는 것을 질색했던 탓에 아주 가끔이나 그랬지. 그런데 오늘은 이 불청객도 아주 순순했다. 방금까지의 혼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를 따라서인지 바람도 한층 기운을 잃고 잠잠했다.
“가족을 만났다고 했잖아.”
“부모님?”
“그래. 한참 안 봤더니 얼굴을 잊었는데, 그래도 부모님께서 먼저 나를 알아봐 주셨다. 연꽃이 가득 핀 호수 앞에 자리 잡으셨더라. 보고 있으니 좋았어. 나도 거기서 지낼까 해.”
“나도 네 부모님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같이 갈래?”
“아니, 나는 할 일이 많아서 안 돼.”
“그럼 다음에?”
“응, 다음에. 네가 데리러 와.”
“넌 늘 그런 식이지. 왜 이리 바쁘냐.”
“내가 재주가 많은 걸 어찌하겠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욕심쟁이로군.”
“이제 알았니?”
영하가 조용히 웃었다. 문 건너편에서도 웃음소리가 났다. 어릴 적의 꼬맹이들 이야기가 몇 번이나 오갔다. 공유하는 기억은 많았고 그중 하나를 잠긴 호수 아래에서 끌어올리는 것쯤이야 아주 손쉬운 일이다. 그들은 평소처럼 서로의 탓을 하며 싸웠다가, 일다경이 지나기도 전에 딴소리를 하며 얼렁뚱땅 화해하고, 서로를 걱정했다. 회랑이 늘 하는 말이 또 튀어나왔다. 넌 너무 약해. 이런 녀석 두고 어떻게 가나. 영하의 얼굴에 피었던 미소가 흘러내리듯 천천히 사라졌다.
“그래도 가.”
“오냐. 간다, 가.”
닭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깥이 밝아올수록 그림자도 옅어졌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는 걸음에도 소리는 없었다.
“엽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영하는 몇 번을 더 불렀다. 엽아. 거기 있니?
한 시진이 지나서야 찾아온 후기지수 하나가 찾아와 문밖에서 조심스레 영하를 불렀다. 제명림 바깥에 신원미상의 시신이 한 구 놓여 있었는데 문주께서 아는 분이신지 거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고를 불러오라 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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