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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림 깊은 곳에는 한때에 불야성이라 불리시던 분이 기거하신다던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본인의 처소에서만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문파의 큰 어르신들께서는 영하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심지가 굳지 못해 곧잘 꺾이곤 했다며 이리될 줄 알았다고 가봐야 좋은 영향은 받지 못할 거라며 가까이 가지 말라셨습니다. 진아 사형께 물으니,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 믿지 말라고 하시며 그분은 정말 대단한 진법 실력을 갖추셨고 현 문주님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기에 저는 마치 이야기 속의 용을 찾으러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 걸음하곤 했습니다.
앞뜰에는 수국이 가득 피어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높이 자라 그늘진 처소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 거의 없어 평소에는 누군가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고요한가 하면 또 하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매일 끼니를 나르는 시비를 제외하면 몇 달에 한 번 사숙들이나 문주께서 들르시는 걸 제외하고는 찾는 이조차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형제들에게 하자 귀신 들린 여인의 이야기를 모르냐며 겁도 없다 타박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그곳은 불야성의 처소가 아니고 귀신 들린 여인의 처소이며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 밤이면 여인이 문 앞에 앉아 누군가와 온종일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침 돌아오는 휴일이 마지막 날이기에 사형제들과 함께 소문의 진위를 따져보기로 하였습니다.
호롱불을 챙겨 허겁지겁 뛰어가자 이미 사형제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리 늦었냐는 질타에 챙겨온 당과를 하나씩 입에 넣어주고 기다리자, 처소 문 너머로 흐릿한 사람 그림자가 비칩니다. 무어라 속닥거리고 작게 웃는 소리가 꼭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문밖엔 저희 말곤 아무도 없으니 귀신 들린 여인이라는 소문이 꼭 틀린 말도 아니게 느껴졌습니다.
“네 이놈들!”
“와아악~!”
“어르신 처소 앞에서 장난치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사형! 혼내지 마세요!”
도깨비 같은 얼굴로 나타난 진아 사형을 피해 혼비백산한 채로 도망치다 넘어지자 금세 평소의 사형으로 돌아와 저를 일으켜 세워 흙먼지를 털어주십니다. 사형제들은 그사이 전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어르신 처소가 맞나요? 애들 말로는 귀신 들린 여인의 처소랬어요.”
“요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사형께서는 제게 가볍게 딱밤을 놓고는 처소 문 앞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문 너머의 그림자에 말을 겁니다.
“저 왔어요, 진아예요. 오늘은 소개해 드릴 애가 있어서요. 이 애는 향이라고 하는데 저희 막내예요.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사숙. 향이가 인사 올려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인사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그래. 이가에 수학하러 가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그때엔 우리 둘 다 집안의 막내였는데 어느새 이리 커서 벌써 나를 사숙이라 부르는 아이들이 생겼다는 걸 깨달으니 지나간 세월이 체감되는 거 있지.”
“엽이 넌 나이를 먹어도 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 남들 앞에선 이러지 마. 후배 보기 부끄러워 어떡할 거야?”
“사형, 사숙께서… .”
“매일 밤 이러시는 건 아냐. 일 년에 딱 하루. 오늘만. 친우분의 기일이거든.”
사형께서는 조용히 인사 하시더니 저를 데리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걸음을 옮기며 사숙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아주 예전에는 죽림 전체를 에워싼 진을 홀로 만들어 내실만큼 대단한 실력을 뽐내셨지만, 최근에는 아주 가끔만 처소를 벗어나 죽림의 진을 고쳐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숙의 상황이 이미 제명림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나 다른 아이들처럼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야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적당히 겉의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것이지요. 그리곤 제게도 이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명림의 담벼락을 넘지 않게 해달라고요. 저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 여러 해가 지나고 사숙께서는 더 이상 처소 밖으로 걸음하지 않으십니다. 사숙의 이야기를 모르는 제명림의 사람 또한 없으며 정신이 나간 이에게 일을 맡길 수 없다며 아주 가끔 맡던 일감마저 돌아가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 낮잠을 자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기에 저는 아주 오래간만에 사숙의 처소로 향했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린 걸지도 모릅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처소의 문이 아주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사숙으로 보이는 여인은 옥이 달린 다 낡은 머리 끈을 하고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 새벽 해가 떠오르기 직전까지도 기다리는 이는 찾아오지 않는 듯했습니다.
"엽아."
"엽아? 올해엔 찾아오지 않는 거니?"
“그러고 보니 지난해에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 쫓아냈던가. 내가 하는 말이라면 청개구리처럼 들어먹질 않더니 왜 이런 말만 잘 듣는 거야.”
“나는 그냥 너마저 날 미친 사람처럼 보는 것 같아서….”
"들어올 수 있게 문도 열어뒀잖아."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
"드디어 내가 맡고 있던 마지막 일마저 빼앗겨 버렸단다. 미쳐버린 이에게 맡길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구나."
"이상한 일이지. 그저 일 년에 단 하루, 그리운 이를 만나 회포를 풀고 묵혀둔 감정을 풀어냈을 뿐인데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날 미친 사람으로 몰아간다니."
"이젠 그 누구도 나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느껴져. 그러니 이곳에 머물러 무엇 하겠어."
"데리러 와 주지 않을래? 오늘이야말로 너와 함께 가야겠다. 같이 가주겠다며."
"아니면 내가 나갈까?"
그리 중얼거리시던 사숙께선 그대로 문밖을 나서 죽림으로 향하셨습니다. 혹여나 길을 잃으시지 않을까 뒤를 따라 걸었지만, 순식간에 뒷모습을 놓쳐 죽림 안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길을 지나던 길잡이에 의해 구해져 돌아간 곳에선 사숙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숙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몇 달이 지났지만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아 귀신에게 홀려 그 뒤를 따라간 것이 분명하다는 말만이 짧게 돌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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